[한라일보] 한라산 자락을 둘러선 자줏빛 나무들이 마르고 단출해진 팔과 허리로 시린 겨울을 오래도록 견디고 있다. 왜 이리 봄이 더딘지. 언제쯤 오려는지.
지난해 12월 3일 이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들이 열흘이 멀다하게 발생하고, 온 국민이 두렵고 참담한 마음으로 무력하게 이를 지켜봐야 하는 비상한 시국이 지속되고 있다. 더욱이 충격적이게도 미국 에너지부는 우리나라를 민감국가에 포함시켰다. 우리나라가 위태롭다.
어쩌면 예견된 비극일지 모른다. 질문하지 않는, 계산할 뿐 성찰하지 않는, 소비하고 돌보지 않는, 결과가 중요할 뿐 과정은 상관없는, 능력으로 줄 세우는, 나와 다른 타인을 혐오하는, 밤도 낮으로 채우며 죽음을 잊은 오만한 삶이 도달한 곳이 바로 지금의 세상이므로. 그리고 이런 세상을 공상과학 영화의 외피를 입혀 풍자적으로 보여준 영화가 최근 개봉한 '미키17'이다.
영화 속 미키는 인정받을 만한 별다른 능력도 없고 잘 속아서 늘 손해 보지만 그래도 웃으며 넘기는 순둥이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미키는 정말 무능하고 무가치한가?', '능력이란 뭘까?', '어쩌면 미키야말로 서로 잘났다고 떠들며 경쟁하는 사람들 사이의 벌어진 틈을 묵묵히 메워주는 흙 같은 존재 아닐까.'
영화 '미키17'은 사회 풍자적 우화이자, 성장·심리소설이고, 사랑과 공존에 대한 이야기다.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비참함 속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미키17의 생명력은 있는 그대로의 미키를 사랑하는 나샤로 인해 꺾이지 않았고, 자신과 상반되고 참기 어려우며 없애버리고 싶은 또 다른 자기, 미키18과의 화해를 통해 통합된 인격으로 성숙했다. 그리고 여기서 기억이 매우 중요하다. 공유된 기억이 있기에 미키와 나샤의 사랑이 지속될 수 있었고, 미키17과 미키18이 트라우마와 갈등을 넘어설 수 있었다. 미키를 미키이게, 우리를 한국인이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그것. 기억은 정체성을 형성하고 현재를 두텁게 하며 사랑이 흐르게 한다. 한 사람의 현재의 너비와 깊이는 그의 감수성과 인품을 좌우한다. 어쩌면 가장 나약하고 무력해 보이는 미키의 현재가 그 누구보다 두터웠기에 그는 계속해서 나샤를 사랑하고 자신을 배신한 친구도 포용하며 낯선 크리퍼와도 소통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
봉준호의 영화에는 위트가 있다. 심각하고 비참한 상황에서도 그의 영화는 명랑함을 잃지 않고 쉽게 기죽지 않는다.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세상이 암울할 때에도 낙천적이다. 자신과 타인 그리고 미래를 위해 생명의 기운을 북돋는 것이다. 자기와 세상이 연결된 하나임을 알기에 자신의 사소한 경험을 세상에 보태고, 자신의 작은 변화로 세상에 기여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지혜를 살려는 이는 명랑함을 훈련해야 한다.
돌아오는 산자락 길목에서 다시 만난 나무들에 물오른 푸릇함이 돌고 있다. 아, 봄은 오고 있다. 우리가 그토록 간절하고 끈질기게 부르고 있는 봄이.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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