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어느 날, 한순간에 혼돈의 국가에서 살게 된 요즘은 얼어붙은 경기까지 무엇 하나도 국민의 일상에 즐거움이 없다. 이러한 위기의 시대에 조금이나마 위안은 문화 예술의 향유 속에서 얻을 수 있다. 올해 제주의 겨울은 다행스럽게도 각종 문화 프로그램으로 풍성하다. 미술계만 보더라도 '제주비엔날레'가 제주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고, 특히 제주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모네에서 앤디 워홀까지: 서양미술 400년, 명화로 읽다'의 전시는 근·현대미술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감상할 수 있으리란 끌림이 있다.
오랜만에 방문한 제주현대미술관은 여전한 품격으로 관람자를 환영한다. 이 미술관은 김석윤 건축가의 작품으로서 좌향이나 재료의 쓰임 등에서 제주의 정체성을 담아낸 건축이다. 건축에 내재된 현대적 작품성은 제주현대미술관이 현대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구심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협조로 89명의 작가, 143점의 작품을 내놓고 있다. 윌리엄 터너, 귀스타브 쿠르베, 폴 세잔,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데이비드 호크니 등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풍성해지는 화가들이 제주에 온 것이다. 전시는 총 9개의 섹션으로 구성돼 있는데, 첫 번째 '꿈에서 탄생한 미술관' 섹션에서는 요하네스버그 아트 갤러리의 설립자인 '플로렌스 필립스' 여사의 사연이 소개된다. 누군가의 열정과 신념으로 시작된 미술관이 시민사회의 장소로 거듭나는 전형적인 스토리다. 다음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예술 현장' 섹션은, 이름 모를 아프리카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갤러리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어서 인상적이었다. 이어지는 섹션은 네덜란드의 근대미술,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미술, 인상주의,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20세기 컨템퍼러리 아트까지 근·현대 서양 미술사를 순례하게 된다.
익숙한 명작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는 달리, 전시 작품들이 대부분 습작이나 소품들이어서 다소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섹션에 들어서는 순간, 너무도 반가운 그림을 발견한다. 작은 인물화로, 건축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화가 중 한 분이라 할 수 있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 걸려있는 것이다. 베이컨의 회화에서 발견되는 '해체와 비재현적 사유'는 건축의 현대성을 이해하는데 주요한 레퍼런스로 작동해 왔고, 당연히 건축가들에게 관심 있는 화가로 위치한다. 한동안 작은 인물화 앞에서 담담하게 베이컨을 조우했다. 이 해괴한 그림에 담긴 작가의 예술성이 문화 전반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니, 당대 최고가의 작품을 직관했다는 감동에 더하여 새삼 예술의 힘에 숙연해진다.
주말 몇 시간 동안의 그림 산책을 뒤로한 채 미술관을 나섰다. 양극으로 갈라 쳐 있는 혼돈의 국가 상황에 심란한 마음을 털어내는 위안의 시간이었다. 이제 제주가 문화향유지수 측면에서도 살기 좋은 도시가 됐음을 실감한다. <양건 건축학박사·가우건축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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