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덜 고통스럽고 더 인간적인 일

[영화觀] 덜 고통스럽고 더 인간적인 일
  • 입력 : 2025. 02.17(월) 03:45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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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룸 넥스트 도어'.

[한라일보] 20대에 만났던 친구들과 자주 향하던 곳은 퇴근 후의 술집이었다. 그때는 별 다른 이유 없이 모여서 마시고 떠들고 노래하며 새벽을 맞곤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친구들의 얼굴을 보게 되는 곳은 결혼식장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뜸했던 관계들의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니 이제 예전의 친구들을 만나는 곳은 장례식장이 되었다. 몇 년 넘게 연락이 오고 가지 않던 이들과 약속도 없이 같은 색의 옷을 입고 만나게 되는 곳, 비문의 농담처럼 '생사를 확인하려면 장례식이라도 와야지'라고 하는 말들, 복잡한 감정이 담겨 쉬이 넘어가지 않는 소주 한 잔을 건배 없이 나누는 일.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지만 어쩐지 더 빈번해지는 죽음들의 당도 앞에서, 물러설 곳이 없는 생의 전진 앞에서 나는 가만히 멈춘다.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삶과 죽음으로 뒤엉킨 실타래를 더듬어 풀어나가는 데에는 때론 길고 긴 겨울의 하룻밤이 모자랄 때도 있다.



누구보다 뜨겁게 생의 열망을 선연한 색감으로 노래했던 스페인의 명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룸 넥스트 도어]를 뒤늦게 극장에서 봤다. 지난 해 10월 개봉해 무려 5개월 넘게 극장에서 상영 중인 이 작품은 이제 전국에서 단 한 곳 광화문의 씨네큐브에서만 만날 수 있다. 씨네큐브는 중장년 관객들이 많이 찾는 예술영화관으로 평일 낮 시간대의 상영관 안에는 영화 속 주인공들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여성 관객들이 많았다. 자신의 방식으로 죽음의 시간을 선택하는 마사(틸다 스윈튼)와 친구의 그 선택에 이어지는 간곡한 부탁을 수용하는 잉그리드(줄리안 무어)의 이야기인 [룸 넥스트 도어]는 아마도 또래의 여성 관객들에게 더 가 닿는 측면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전원을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포털 뉴스 창에는 모르는 사람들의 죽음이 뉴스가 올라왔다. 전혀 모르는 죽음도, 알고 있지만 가깝지 않은 이의 죽음도 있었다. 영화 속에는 상복이 등장하는 장면도 장례식장의 모습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지난 해 찾았던 장례식장의 풍경들이 뒤엉킨 채 떠올랐다. 죽음이 도처에 있다는 것은 산 채로 밖에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살아 있다는 생생한 감각이야 말로 죽음과 가장 근접한 촉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살아서 죽음을 생각하는 일을 이제 두렵다고만 느끼지는 않는다.



[룸 넥스트 도어]속 마사의 직업은 종군 기자였고 그는 누구보다 생에 강렬하게 돌진하던 이였다. 그는 또한 홀로 아이를 낳아 키웠으나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지는 못한 채 스스로의 삶에 더 몰두한 이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중병에 걸린 채 침상에 눕게 된다. 한때 자신과 가까웠던 잉그리드가 병실로 마사를 찾아오고 꽤 긴 시간 소원했지만 한 시절 서로에게 더없이 맞춤이었던 두 사람은 다시금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소설가인 잉그리드는 이야기와 가까운 사람이지만 죽음을 앞 둔 친구 마사가 새롭게 써내려 가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녀에게도 어렵고 낯설다. 죽음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하기로 한 마사는 그 죽음의 순간에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옆방([룸 넥스트 도어])에 있어 달라고 청한다. 산 자의 곁에서 죽음을 배웅해 달라는 마사의 부탁을 잉그리드는 고민 끝에 수락한다.



마사는 자발적 안락사를 선택한다. 불법적인 경로로 약물을 구하고 자신의 원하는 공간과 시간에 자신의 죽음과 약속해 만난다. 전세계적으로 웰 다잉에 대한 법적인 논의가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마사의 죽음은 현재로서는 범법자의 행위가 아닐 리 없다. [룸 넥스트 도어]는 마사의 죽음 이후에 꽤 긴 러닝 타임을 마련해 놨다. 죽음의 조력자인 잉그리드가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 장면에서는 이전까지 두 사람의 개인적 관계로 보였던 한 사람의 죽음이 사회적인 범죄로 돌연 비춰질 수 있다는 점을 영화는 생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마사의 딸과 잉그리드가 만나는 장면에서는 떠난 이가 남긴 생의 조각을 자신의 삶에 다시 끼워 넣는 잉그리드의 모습을 통해 죽음이라는 순간이 삶의 끝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영화는 차분하게 보여준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 [사슴벌레 문답]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죽음은 어떻게 찾아와?/죽음은 어떻게든 찾아와'가 될 것이다. 삶이 모두에게 공평한 것처럼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삶은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는 모두에게 공평한 과제일 수 밖에 없다. 임종의 질 또한 삶의 질의 연장선상에 놓인 스스로의 선택이 되어야만 할 것이고 내 삶에 그랬던 것처럼 죽음에 또한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 애도의 옆방을 지켰던 잉그리드의 용기가 꺾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삶이라는 불꽃을 자신의 입김으로 온전히 소진하고자 했던 마사의 용기 덕이 아니었을까. 덜 고통스럽고 더 인간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은 삶이라는 불확실하고 연속적인 백지 위에 내 필체로 새겨 넣는 서명을 고르는 심사숙고 후의 안도와 닮지 않았을까.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공들여 쓴 인생 페이지의 마지막을 덮어줄 친밀한 단 한사람을 기다린다. 누군가가 나를 그 자리에 초대해 주기 또한 기다린다. 그렇게 죽음에게로, 평화에게로 뚜벅뚜벅 가는 발걸음이 되고 싶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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