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꺼내지 못한 그 말… 역사의 기억이 되다 [리뷰]

수십 년 꺼내지 못한 그 말… 역사의 기억이 되다 [리뷰]
[공연장에서] 극단 세이레 '오사카에서 온 편지'
제주4·3 때 밀항 제주여성 이야기
과거와 현재 교차해 당시 삶 조명
고향서 다시 되찾은 정자 목소리…
공동체 안에서 치유·상생 한 발짝
  • 입력 : 2025. 02.09(일) 17:44  수정 : 2025. 02. 11(화) 10:53
  • 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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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세이레의 연극 '오사카에서 온 편지' 속 한 장면. 일본 오사카 시츠코 식당으로 자신을 찾아온 작가 상훈을 외면하는 정자(맨 오른쪽)의 모습. 극단 세이레 제공

[한라일보] 2003년 제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힘겹게 버스 정류장에 앉는다. 누굴 기다리느냐는 말에 "아들"이라고 답하지만, 이제 올 때가 됐다는 아들은 오지 않는다. 한 남성이 기억 저편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듯, 제주4·3 때 마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굴왓'과 아들 '강길남'에 대해 재차 물어보지만 할머니는 나지막이 그리움 짙은 말만을 내뱉는다. "아무도 어서…. 메느리는 살아신가."

극단 세이레의 새 작품 '오사카에서 온 편지'는 연극 포스터에도 담긴 이 한마디를 시작으로 제주와 일본을 교차한다. 무대 위 공간만이 아니라 시대적 배경도 앞뒤로 넘나든다. 4·3 당시 남은 자와 떠난 자, 산 자와 죽은 자의 중심에는 '메느리'(제주어로 며느리) 고정자가 있다.

제주를 떠나온 지 수십 년이지만 극 중 정자는 여전히 제주말을 한다. 그가 주인인 일본 오사카의 '시츠코' 식당은 고기국수와 몸국 같은 제주 음식을 판다. 몸에 밴 '제주'를 안고 살면서도 정자는 과거의 기억에는 철저히 입닫는다. 봉제 공장에서 구해준 인연으로 60년 지기가 된 친구 미츠코, 친딸처럼 거둬 키운 마유도 자세히 듣지 못한 얘기다.

극은 4·3을 온몸으로 겪은 제주 여성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작가 강상훈이 정자를 찾아오면서 묻혔던 아픔을 따라가게 한다. 상훈이 정자에게 건네는 사진, 시어머니의 말, 남편 소식 등이 시간을 과거로 돌리는 매개가 된다.

젊은 정자와 길남의 사랑. 극단 세이레 제공

서북청년단에게 위협을 당하는 젊은 정자와 시어머니. 극단 세이레 제공

1947년과 1948년, 4·3 당시 제주로까지 거슬러 내려가는 무대는 정자와 길남의 사랑에 때론 애틋하지만 대개는 처절하다. 마을을 옥죄는 서북청년단의 군홧발에 야학 선생이던 길남은 결국 산으로 올라가고, 정자는 산에 간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총칼로 무장한 서북청년단이 길남을 찾아 집으로 쳐들어온 그날, 갓 태어난 정자의 아이 어진이마저 죽게 된다.

정자의 기억 속 고통을 내달리던 무대는 다시 2009년 오사카로 옮겨진다. 지금껏 전혀 모르고 살았던 남편의 이야기에 큰 울음을 토하고 나서야, 살아남았어도 "죽은 목숨"처럼 살았던 제 감정을 내비치기 시작한다.

수차례 앞뒤로 움직이던 시간이 비로소 멈추는 곳은 '2012년 제주'다. 60년이 흘러 고향 제주를 찾은 정자는 과거의 기억을 가뒀던 빗장을 풀어내듯, 여전히 그대로인 바다에서 목놓아 그리움의 단어를 소리친다.

영상 화면으로 대체된 이 장면은 상훈과 정자, 미츠코가 나란히 앉은 무대 위 '또 다른 무대'의 관객과의 대화로 연결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 잃고, 버리고" 바다를 건넜던 정자가 쓰고 읽은 한 편의 시는 그동안 부치지 못했던 '편지'이자 누구의 아내, 며느리가 아닌 정자 자신의 '목소리'가 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 없이 떠난 자와 남은 자를 감싸안는 듯한 배우들의 몸짓. 제주4·3평화공원에 놓인 모녀 조형물 '비설'(飛雪)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극단 세이레 제공

상훈이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털어놓고 사죄하며 이어지는 극의 마지막 장은 무대의 절정이자 큰 메시지와 같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 없이 떠난 자와 남은 자를 감싸안는 듯한 배우들의 몸짓이 대사 없이도 울림을 준다. 모두를 위한 치유의 포옹이자 단단한 연대 같기도 하다.

밀항으로 제주와 단절됐던 정자가 다시 바다를 건너고 제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상황, 감정의 변화를 관객이 더 섬세히 따라갈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하지만 배우들의 연기와 전체 맥락의 흐름은 정자의 이야기로 다시 4·3을 생각하게 하며 약 100분을 흔들림 없이 끌고 나간다.

연극은 지난 7일과 8일 세이레 아트센터에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관객과 만났다. 극단 세이레가 '2024 지역 대표예술단체 지원사업'으로 내놓은 작품이다. 같은 제목의 영화 '오사카에서 온 편지'(감독 양정환)를 원작으로 했지만 새롭게 쓰여진 이야기다. 연출을 맡은 정민자 씨가 강은미 작가와 함께 대본을 썼다.

김이영(정자 역), 이지선(미츠코), 이룻영실(마유), 강상훈(작가), 김현주(젊은 정자), 전유비(강길남), 김금희(시어머니), 강민엽(종수), 김시혁(충훈), 이경식(서북청년단 대장), 김석진(서북청년단1), 고호건(서북청년단2), 김구민(서북청년단3), 강온유(영상 출연) 등이 출연했다. 극단 세이레 김이영 대표는 "오는 4월에 열리는 대한민국연극제 제주예선대회에 이 작품으로 참가할 예정"이라며 다음 만남을 예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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