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제주시 중심지에서 서남쪽으로 서부산업도로 초입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상으로 노형동에 속하는 자연마을이지만 법정동이다. 동쪽에 도근천과 서쪽에 무수천이라고 하는 큰 하천을 경계로 동쪽은 월산마을, 서쪽은 애월읍 광령리와 마주하고 있다. 남쪽은 한라산 방향으로 풍부한 초지와 자연 자원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도평동과 경계를 이룬다. 현재 노형동의 서남쪽에 위치하는 역사 깊은 마을이다. 전체 면적 20㎢ 중의 77%가 자연녹지라는 데서 자연환경 경쟁력이 높은 마을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마을 동서쪽을 흐르는 한라산에서 발원한 규모 큰 냇가 사이에 형성된 마을이기에 중심을 흐르는 어시천까지 포함하여 풍부한 생태 자원까지 보유하고 있기에 그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식물분포만 하더라도 총 590분류군이나 된다. 한라산 북사면으로 침엽수와 관목림이 잘 자라고, 낙엽활엽수림대까지 보유한 자연환경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부피와 면적이 큰 어승생오름(해발 1169m)과 어리목, 아흔아홉골까지를 아우르는 한라산에 중요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마을이기에 그 잠재력은 엄청나다고 해야 할 것이다. 1960년대 어승생저수지 개발을 감행하는 대상지로 입지 선정을 한 것은 조상 대대로 한라산에서 흘러내리는 수자원이 가장 풍부한 여건이었음을 파악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천 못지않게 정주 여건이 좋은 가옥밀집지역 부근에 솟아나는 샘물이 많은 것도 오래전부터 마을이 형성 되어 번창할 수 있었던 요인이라고 한다. 샘물 이름들이 제주어의 원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정감이 넘친다. 주루래물, 조리물, 웃바리물, 알바리물, 새미쪼암물, 오갱이도물, 미낭굴물 등 22곳. 한문으로 음독이나 훈독을 허용하지 않아서 깊은 정체성이 느껴진다.
해안(海安)이라는 지명이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최초의 기록은 1653년(효종 4년) 탐라지가 처음이다. 372년 전부터 여기에는 촌락이 형성되어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왕조의 관영목장 정책에 의한 10소장 중에 4소장 운영의 중심역할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지명인 직사와 아직도 남아있는 상잣성과 하잣성 돌담들이 보여주는 목축의 역사를 보면 이 마을의 조상들이 어떤 일로 살았었는지 알 수 있다. 유물에 의한 추정이 가능한 사실로 볼 때, 고려시대 폐사지들이 지명과 함께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문수암, 서천암, 과남절(괘남절) 등이 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규모가 큰 사찰이 존재했었고 그러한 사찰을 중심으로 번창했던 마을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설촌의 역사는 700년 이상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마을공동체의 전통적 정신문화를 보여주는 당(堂)신앙이다. 흥미로운 것은 하르방당과 할망당이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모셔진다는 것이며, 해안 본향당에 좌정한 주인은 이싱굴대별왕당이다. 소별왕또와 대별왕또가 모셔진다는 것은 천지왕본풀이라고 하는 창세신화에 등장하는 신들로서, 옛날 이 지역은 어떠한 정통성과 위상을 과시할 수 있는 세력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하경수 마을회장에게 해안동이 보유한 가장 큰 자긍심을 묻자 간명하게 한 단어로 축약하여 설명했다. "청량감" 한라산에서 내려오는 산바람과 바다에서 올라오는 바람이 절묘한 위치에서 만나 생성시키는 자연발생적 쾌적함이 냇가와 결부되고 풍부한 자연녹지들과 어우러져 사람이 살기 좋은 여건을 제공한다는 것. 마을공동체의 변함없는 공감대는 이러한 자연 자원을 자발적으로 보존하고 부가가치 높은 경제적 마인드로 승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마을회 산하에 환경감시단을 둬서 다양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을 옛길찾기 복원 사업을 통하여 멸실되어버린 농로나 옛 소로의 기능을 되살리는 일이야말로 마을공동체의 역사성과도 잇닿아 있다.
교통의 요지이며 하천과 방대한 초지, 쾌적한 정주 여건과 멀리 한라산과 바다를 조망 할 수 있는 부가가치 높은 조망권이 경쟁력의 토대가 되는 발전 잠재력 최강 마을.
어시천 냇가의 아침<수채화 79㎝×35㎝>
중산간 마을임에도 수자원이 풍부했던 마을이기에 그 특별한 의미를 마을 중심을 흐르는 냇가를 그려서 뜻을 더하기로 하였다. 더 큰 이유 중에 하나는 필자가 제주의 마을 대부분을 돌아다녀 본 바에 의하면 마을공동체 영역 단위 기준으로 다리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마을 안을 돌아다니며 파악한 숫자만 하여도 10여 개가 된다. 마을이 보유한 특색이 분명하다. 다리를 그리면서 파격적인 구도를 설정하여 난간 부분을 빼버렸다. 그러면 다리라기보다는 어떤 통로요, 문과 같은 이미지가 된다. 건천이지만 강우량이 많을 때에 저 문을 통하여 지나다는 어떤 생명체가 물이라는 상징성. 인상주의적 화법을 통하여 화려하게 아침햇살이 들어오는 상황을 표현하였다. 실제로 다리의 콘크리트 벽에 벽화처럼 채색을 하고 싶은 욕구를 이렇게 그림 속에서 만끽하고자 한 것이다. 덩달아 이색적인 제안의 의미도 함축하면서 그리고자 한 것이다. 냇가를 가운데 두고 동쪽마을과 서쪽마을이 정주공간을 형성하면서 번창해온 마을. 그 둘을 이어주는 다리들의 옛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고.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빚어진 마을 중심을 폭이 작은 냇가 하나가 흐르면서 경이로운 공간적 풍요를 만들어내는 마을. 그 상징적 조형성을 다리 아래로 비치는 태양광선과 암반, 그리고 인위적 구조물의 조화를 회화적 감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는 곳을 골라서 의미를 발굴하는 소박한 작업이라 여기며 단순함 속에 색채의 환희를 투입하였다.
설경으로 빛나는 한라산<수채화 79㎝×35㎝>
어승생오름 아래 목장 지대에서부터 백록담까지 계곡을 만드는 굴곡을 그렸다. 며칠 동안 이어진 이번 폭설 한파와 같은 상황이 끝나고 쾌청하게 맑은 날 해가 서쪽 수평선 가까운 곳까지 지는 측면 조명이 도와줄 때. 지대가 높은 곳에서 뻗어나간 그림자들이 한라산이 보유한 공간적 웅대한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평소 한낮에는 거리가 멀어서 평면화된 이미지가 뚜렷하게 다가오는 것은 하얀 눈으로 하얀색이 보유하고 있는 뚜렷 한 명도 차이 발생 기능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복합적인 시각적 요인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해발 250m 정도로 한라산과 근접한 위치에서 그리지 않는다면 이러한 명확한 한라산의 계곡 흐름은 파악할 수 없을 것이다. 행운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입춘이 지났음에도 폭설에 뒤덮인 상황을 만날 수 있었던 것. 명료성을 중시하여 포스터에 가까운 명암법을 구사하기로 하였다. 상황 파악을 위한 그림에 가깝도록 그려야 하는 풍경화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리라. 화면 오른쪽에 큰 존재감으로 자리 잡은 어승생오름의 그림자가 아흔아홉골은 덮고 그 아래 펼쳐진 목장 지대와 나무들이 산과 평지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듯하다. 마을 지도에 나타난 면적은 어리목에서 백록담 방향으로 향하는 계곡을 따라 한참 올라가는 지점까지다. 한라산의 옹골찬 정기가 가장 힘차게 뻗어 내리는 마을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하기 위하여 그린 그림이 된 것이다. 저 계곡에까지 약초와 수렵을 위해 오르던 조상들의 기백을 흠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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