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항은 천지연에서 좌우로 펼쳐진 높은 절벽과 새섬과 문섬 등으로 가려져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의 항구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최적의 요지였다. /그림=강부언
1589년 이옥(李沃) 목사 때 홍로에서 이설하며 설촌 시작돼일제강점기 서귀항 개발하며 산남 대표하는 도시로 급성장서진노성·觀星臺·남성대 등 옛부터 장수 관련 이야기 무성
옛 서귀진성 터를 찾아 가던 지난 18일 아침 기상예보는 올들어 가장 추운 날이 될 거라고 했다. 한라산에는 밤새 많은 눈이 내렸는지 정상부근에는 백설이 덮혔다. 그러나 서귀포시로 넘어가면서 두툼하게 차려 입은 외투는 금새 벗어야 했다. 날씨가 너무 따스해 땀이 배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소나무숲이 무성했다고 해서 붙여진 솔동산을 잠시 내려가면 남쪽 모퉁이에 서귀진성 터가 나타난다. 오래전부터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옛 자취는 찾기 힘들다. 다만 관련 고문헌을 통해 머리 속에서나 그림을 그려 볼 뿐이다.
▲서귀진의 조련, 군기, 말을 점검하는 탐라순력도의 서귀조점.
1702년 이형상 목사가 남긴 탐라순력도의 서귀조점(西歸操點)을 펼치면 서귀진의 윤곽이 비교적 상세히 나타난다. 서귀진성을 중심에 두고 위쪽에는 구서귀(舊西歸)라는 표시와 함께 무너진 성벽의 흔적이 그려져 있다. 좌측에는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진 계곡과 함께 천지연이, 서쪽 높은 언덕에는 삼매망 봉수대가 나타난다. 서귀진은 서귀조점에서도 나타나듯이 본래 홍로촌 위쪽에 있었다.
그런데 1589년(선조 22년) 이옥(李沃) 목사가 서귀포로 옮겨 축성하였다. 둘레는 825척5치이고, 높이는 12척이었다. 성문은 동과 서에 있었다. 집채는 북성안 중앙에 객사를 두고 좌우로 진사, 무기고, 사령방, 포주, 창고 등이 배채돼 있다. 당시 서귀진에는 성정군 68명, 목자와 보인(保人) 39명을 합해 약 1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정방폭포 상류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다 못을 만들고 그 물을 성밖으로 흘려보내어 논밭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물길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그 자취가 남아 있었다.
▲개발전 서귀항 어선부두가 자갈바닥을 드러낸 모습. 천지연 절벽을 넘어 한라산이 보인다.
그런데 서귀진을 위해 이 물길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 보면 정방천의 물길을 끌어 논밭을 만든 것은 탐라시대부터라는 글이 보이기 때문이다. 탐라지 기록이 사실이라면 서귀진의 물길은 기존에 흐르던 물길을 연장해 만든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순력도를 보면 다른 진성과 달리 바닷가에 단 두채의 집만 그려져 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성 주변에 여러채의 집을 그리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그 수가 매우 적다. 그 만큼 사람이 적게 살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처럼 당시 서귀진 주변에 민가가 적어 외로웠기 때문에 관에서는 주변의 폐(廢)목장 땅을 백성들에게 경작토록 하여 영구히 감세(減稅) 조치하였다. 일종의 인구유입을 위한 유인책을 쓴 셈이다. 따라서 서귀리의 설촌은 서귀진 이설과 함께 시작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귀진은 영주12경의 하나인 '서진노성(西鎭老星)'으로 유명했다. 즉 장수를 상징하는 노인성을 볼 수 있는 진성(鎭城)이라는 의미다. 노인성에 관한 이야기는 고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서귀포는 1930년대 이후 서귀항이 개발되고 사람들이 크게 몰리면서 산남을 대표하는 도시로 급성장했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그런데 옛날에는 서귀포에 관성대(觀星臺)가 있었다는 글도 전해진다. 1935년 중앙조선협회에서 발간한 자료집에 실린 츠르다 고로오(鶴田吾郞)의 '제주도의 자연과 풍물'이 그 것이다. 그는 당시 20일간 제주에 머물며 섬을 일주한 뒤 여행기를 남기고 있는데 서귀포지역에 대해 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옛날에 이곳(서귀포)에는 관성대(觀星臺)라는 것을 설치하여 8월 밤에 별이 가장 잘 보인다고 할 때에 전도에서 몰려 온 사람들이 이 관성대에 서서 남극성(南極星)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남극성을 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장수할 수 있다고 해서 기뻐했다는 것인데 지금은 관성대가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이 글이 사실인 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귀진이 '서진노성'으로 유명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귀진에 '관성대'라는 누정(樓亭)이 있었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전통이 있어 삼매봉에도 남성대가 세워진 것은 아닐까.
서귀포는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한적한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서귀항이 개발되면서 갑자기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그 후 서귀포는 산남을 대표하는 도시로 급성장하게 된다. 여기에는 천지연에서 좌우로 펼쳐진 높은 절벽과 새섬과 문섬 등으로 가려진 포구가 바람과 파도를 막아주는 천연의 항구로서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더구나 서귀포 해안은 돌고래가 자주 출몰하는 연안이었다. 천지연하구에서 새섬으로 이어지는 방파제를 만들고 그 곳에 고래공장을 세운 것도 유달리 고래고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로서는 군침을 삼키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