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북정은 16세기 후반에 세워진 유서 깊은 정자로 1971년 제주도 유형문화재 3호로 지정되었다. 성의 규모는 도내 9鎭중 가장 작지만 연북정과 조천관으로 널리 이름을 알려왔다. /그림=강부언
1509년 李沃목사가 朝天鎭 동성 위에 세워일제강점기 건물 고쳐 경찰 주재소로 사용설문대할망 '連陸의 전설' 깃든 엉장메도
말복을 이틀 앞둔 지난 12일 조천읍에 소재한 연북정(戀北亭)을 찾았다. 비가 잦은 여름인데 그날은 유난히 햇볕이 강렬하게 내리 쬐어 숨을 헐떡이게 했다. 정자 밑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촌로 몇몇이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정자 그늘에서 바다를 조망하니 겨드랑이에도 차츰 찬 바람이 스며들었다.
1971년 8월26일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된 유서 깊은 건물인 연북정은 임금을 그리워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이 신하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치부되던 왕조시대를 상징하는 유적이다. 연북정은 조선조 제주에 있었던 3성 9진의 하나인 조천진성은 둘레가 428자, 높이가 9자인 성으로 알려져 있다.
연북정에 올라 주위를 살펴보면 지금은 주위가 많이 매립돼 흔적이 뚜렷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바다쪽으로 돌출된 진성(鎭城)이었다. 그래서 3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으로만 통할 수 있는 형태로 구축되었다. 성안에는 조천관과 주방, 마굿간, 군기고 등이 있었고, 동성 위에 연북정이 세워졌다.
조천진은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목사가 전부장(前副長) 서만일을 시켜 조천포구에 축성했다. 동성 위에 정자를 세워 쌍벽정이라 했는데 1599년(선조 32) 성윤문목사가 이를 연북정(戀北亭)이라 고쳐 부르게 했다. 탐라순력도의 '조천조점' 그림을 보면 연북정은 성안에 돌계단을 마련하여 오르게 하였고, 집채는 동쪽에 회랑을 지어 당, 무기고, 포주 등이 배치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1781년(정조5) 제주에 순무어사로 왔던 박천형은 "진(鎭)터가 바닷속으로 쑥 들어가 있어 배가 출항하는 데에 아주 편리하다. 그러므로 진상 물종을 실은 배는 대부분 이 진에서 출항하고 육지에서 들어오는 선박도 대부분 이곳에 도착하여 정박하므로 성안의 요로가 된다. 그러나 성 안에는 우물이 없고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도 없어서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 성을 지키기가 어렵다."고 했다.
조천진은 9개 진성 중 규모가 가장 작은 진성이다. 그럼에도 옛부터 이름을 널리 알려 왔다. 이는 그 속에 있었던 조천관과 연북정 때문이었다. 관(館)은 일반적으로 중앙이나 지방의 관리들이 공무로 출장을 다닐 때 머물며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세운 관아건물이다. 조선시대 제주에도 몇 곳에 관(館)이 세워졌는데 지금의 서귀포시 영천동에 있었던 영천관도 그 중의 하나다.
조천관이 유명했던 것은 박천형어사가 지적한 것처럼 조천진이 육지부를 오가는 배가 출항하기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과 무관치 않다. 조천포구는 화북포구와 함께 관원이나 해상무역을 하기 위해 육지부를 왕래하는 관문이었다. 그들은 물 때를 보며 조천이나 화북포구로 몰려 들었다. 많은 진상 물종을 실어 날으려면 그에 따른 많은 관리들이 필요했다. 당연히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추어져야 한다. 조천관은 이런 필요성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조천진성은 다른 진성과 달리 남문만 있었다. 이는 성의 형태가 바다로 돌출하며 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그러나 진상품을 제 때에 조정으로 보내려면 배가 순조롭게 출항할 수 있도록 순풍이 불어 주어야 한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하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이다. 연북정은 그런 기다림 때문에 세워진 후풍소였다. 즉 기상관측소인 셈이다. 연북정의 의미는 '임금을 사모한다'는 뜻으로 붙여졌다. 그러나 북(北)은 신이 좌정해 있는 방위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내려 온 관리들이야 어떨지 모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연북정은 임금이 계신 곳이 아니라 신이 자비를 베풀어 순풍의 조화를 일으키기를 애타게 기다리던 곳일 뿐이다.
1601년 제주에 안무어사로 내려 왔던 김상헌이 남긴 '연북정' 시도 그런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봄을 관장하는 신령이 덕화를 베풀어/ 따뜻한 바람이 종일 불어온다./ 어사는 한해를 이 곳에서 보냈는데/ 떠나가는 배는 빠르기가 새와 같다'(靑帝初宣化 東風盡日吹 經年繡衣客 去鷁疾如飛) <오문복의 '탐라시선'에서>
조천포구가 얼마나 성행했는 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도 포구 주변에 지명유래로 남아 있다. '정중당밧'(조천리 2815)이 그것이다. 옛날 이곳에는 '정중밭 정중물 정중부인 정중어미'를 모시는 당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신은 본래 육지에서 입도한 실재 여인으로 많은 배를 가진 부자이면서 평소 주위에 선행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식이 없어 죽자 마을사람들이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폐당한 지 오래됐는데 고려시대에는 관음사가 있었던 절터로도 알려져 있다. 지금도 밭을 갈 때면 기와편이 나온다고 한다.
▲연북정은 일제강점기에는 경찰 주재소로 둔갑, 도민을 옭죄고 수탈하는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연북정에 올라 신흥리쪽을 바라보면 '엉장메'가 보인다. 조천과 신흥리의 경계를 이루는 높은 언덕으로 바다쪽으로 길게 뻗어나온 곶이다.
전설에 따르면 설문대할망은 도민들이 명주로 옷 한벌을 만들어 주면 제주와 육지를 이어 주겠다고 했다. 도민들은 열심히 명주를 짜며 옷을 만들었고, 설문대할망도 연륙을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도민들은 명주 한동이 없어 약속한 날에 옷을 바치지 못했다. 그래서 연륙을 위한 거대한 프로젝트는 무산돼 버렸다. 그 전설의 현장이 바로 '엉장메'다. 옛날 연북정에서 순풍을 기다리던 도민들도 '엉장메'를 보며 무산된 연륙의 꿈에 아쉬움을 느꼈을지 모를 일이다.
이처럼 조천포구에 세워진 연북정은 관원이나 도민들이 본토를 왕래하는 관문이면서 순풍을 기다리던 휴식처였다. 때로는 선비들이 찾아와 시문을 뽐내며 풍류를 논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 곳은 경찰관주재소로 둔갑한다. 탁트인 공간을 판자로 막아 도민들을 옭죄고 박해하는 수탈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