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가 펴낸 ‘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에 수록된 한말의 '애월진성'을 토대로 그린 풍경이다. /그림=강부언 화가
제주城 구조 연구에 소중한 유적
해안 매립으로 주변 풍경 바뀌어
애월진성(涯月鎭城)을 취재하기 위해 오랫만에 애월읍 애월리를 찾았다. 애월읍을 지날 때마다 '애월'이라는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하는 지 궁금해 진다. 애월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벼랑 위에 뜬 달이라는 뜻이다. 1970년대 벗과 애월읍 신엄리 해안가 절벽을 찾은 적이 있다. 그 때 바닷가 가파른 절벽 위에 둥그렇게 떠오른 달을 보며 애월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것일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 애월읍에 관한 자료를 접하며 그것은 필자만의 해석임을 깨달았다.
'애월'이라는 지명은 고려 충렬왕 26년(1300)에 설치한 현촌의 하나로 애월현(涯月縣)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 적어도 7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면 애월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이름인가. 1997년 발간된 '애월읍지'를 보면 애월리의 지형지세가 반달의 지형을 갖고 있는 것에서 찾고 있다. 또 매립전 포구 모습을 보면 내면으로 깊숙이 반원처럼 들어 와 있어 이를 뒷받침 한다는 것이다. 1982년 건설부 국립지리원에서 펴낸 '한국지명요람'에도 포구가 반월과 같은 데서 애월리명이 유래한다고 적고 있다. 애월이라는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하든 바닷가 벼랑 위에 흐릿하게 떠올랐던 보름달의 그윽한 정취를 잊을 수 없다.
애월에는 언제부터 성이 있었던 것일까. 이원조의 '탐라지'에 따르면 애월진은 옛날 삼별초가 관군의 공격에 대비해 쌓은 나무로 구축한 목성(木城)을 그 시초로 보고 있다. 그 후 선조 14년(1581)에 목사 김태정이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애월진성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주위는 255보, 높이는 16척, 서·남쪽 양문에 초루가 있고 성내에는 객사와 군기고가 있었다. 또 성을 지키기 위한 조방장 1인과 진졸 2인, 방군 64명, 척후선 1척이 있었다. 그러나 이형상 목사가 1702년에 펴낸 '탐라순력도'에는 조방장을 비롯해 성정군(城丁軍) 245명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애월진이 왜구의 침입과 선박출입의 증가에 따른 방어·관리 역할이 크게 늘어났음을 의미한다.
300여년 전 마을 안까지 깊숙히 들어 왔던 해수면은 지금은 상당 면적의 매립돼 자취만 남아 있다. 1940년대 애월초등학교를 다녔던 김찬흡선생은 자신들이 학교를 다닐 무렵 일제 때 매립공사가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고 했다. 학교 서쪽 입구에 자리잡은 우체국 일대도 매립된 것이라고 한다. 매립공사에는 많은 석재가 필요했고, 애월진성의 성담은 이들 매립공사에 투입되며 원형이 크게 훼손됐다. 현재 애월초등학교 터로 변한 애월진성은 북성 일부만 남아 있다. 길이는 대략 80여m, 높이는 6m가 넘을듯 하다.
▲'탐라순력도'에 수록된 '애월조점'으로 지금부터 약 300여년 전 애월진성의 모습이다. 해안을 중심으로 성이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성터를 둘러보다 소중한 흔적을 보게 되었다. 옛 성의 원형을 보게 된 것이다. 성담은 안에서 바깥으로 'ㄴ'자 형태를 갖추고 있다. 이는 바깥쪽을 높여 화살 등의 공격을 막으면서 군사들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 너비가 2m 60cm 남짓했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제주의 어느 성에서도 보기 어려웠던 성첩의 형태가 남아 있는 점이다. 사람 눈 높이 정도에 가로 30cm, 세로 20cm의 형태로 구멍을 내어 유사시 활을 쏘며 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들 돌구멍은 약 3m정도의 간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제주도내에서 복원된 옛 성에는 이러한 성첩이 생략돼 있다. 성의 기본적인 기능을 무시한 엉터리 복원인 것이다.
애월진성이 무너지게 된 과정은 제주의 3성(城) 9진(鎭)과 배경이 같다. 1906년 애월진은 엣 군제(軍制)가 폐지되면서 성을 수비하던 군사도, 무기고도 사라지게 됐다. 이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군사의 주둔지와 병력부터 없애기 위한 압력의 결과였다. 애월진성 자리에는 1921년 초등교육기관인 애월 사립공진학교가 들어 서게 되었고, 그 후 1923년 신우공립보통학교로 공식 인가된 뒤 지금의 애월초등학교로 이어지게 됐다.
애월진성은 삼면이 바다를 낀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바다를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자연적 해자(垓字)로 활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 이후 해안매립이 계속되면서 내수면의 면적은 크게 줄어 들었지만 지금도 옛 지형의 모습은 어느 정도 그려 볼 수 있다. 한때 전국 100대 명수의 하나로 꼽혔던 '하물'은 현대식으로 말끔히(?) 정비되었다. 이 때문에 옛 정취는 사라져 버렸다. 개발이라는 미명속에 우리의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이 멸실되고 있는 곳이 어디 애월진성과 그 주변의 풍경 뿐이겠는가.
▲현재 '애월진성'은 애월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고 해안은 대부분 매립됐다. 가운데 큰 건물 오른쪽으로 애월진성의 일부가 보인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애월읍이 낳은 인물들]
고광림 박사 가족들 美 핵심 관료
조선조 장한철·우당 김용하 선생도
일주도로를 따라 애월리를 가다보면 하귀1리 입구에 커다란 바위에 새겨진 '고광림박사 가족 현양비'가 눈에 들어 온다. 지난 2005년 옛 북제주군이 세운 것이다. 이들 가족은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에서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최근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국무부 민주, 인원, 노동담당 차관보를 지낸 고홍주와 형인 경주 씨가 각각 대통령 법률고문과 보건부 보건담당 차관보에 내정된 뒤 지난 6월 상원 위원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들 두 형제의 아버지인 고광림박사는 4남 2녀를 두었다. 6남매 모두 하버드·예일대를 나왔고, 대부분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6남매 가운데 4명이 현재 예일대교수로 재직하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경주씨는 예일대 의대를 나와 하버드 보건대학장을 지냈고, 홍주씨는 하버드법대를 나와 예일대 법대학장을 지내기도 했으니 제주도가 낳은 수재집안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어느 중앙지에 흥미로운 칼럼이 실렸다. 칼럼리스트가 고 박사 집안의 묏자리와 집터를 보기 위해 광령리에 있는 증조부의 묘를 답사했다. 그런데 같이 간 풍수전문가에 따르면 한라산에서 맥이 내려 온 회룡고조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인물이 나오는 것은 풍수지리적인 명당 만이 아니라 그 집안의 유전자와 함께 어떤 교육을 받았으며, 윗대에서 얼마나 적선(積善)한 집안인 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지론을 싣고 있다. 그 주장에 공감하든 아니든 흥미로운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애월읍에는 기억할 만한 인물이 많다. 우리나라 해양문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표해록을 남긴 '장한철', 대우 김우중회장의 선친으로서 제주도지사를 지낸 우당 김용하 선생, 최근에 제주도의회 의장을 지낸 장정언 씨도 이곳 출신이다.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때로는 자신을 들여다 보게 하는 거울이 되기도 한다. 그런 거울이 많을수록 사회는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