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 알뜨르 비행장에 남아있는 일본군 격납고와 주변풍경. /그림=강부언 화가
중국 폭격 위해 구축… 지금도 흔적 남아
日本土 사수 위해 제주 전역 군사기지화'평화의 섬'을 위한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6월 초순 대정읍 상모리 포구에는 해풍에 싱그럽게 물결치는 풀잎들 처럼 관광객들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가파도·마라도를 오가는 유람선은 손님들로 붐벼 예약하지 않으면 승선하기 힘들 정도다. 송악산 해안진지를 둘러 본 뒤 모슬포 알뜨르비행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모슬포는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모슬포=군사기지'라는 이미지가 많은 이들의 뇌리속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물론 지리적 여건이 군사기지가 들어 서기에 적합한 요충지로서의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과 같은 누란의 위기 때는 공산주의의 적화야욕을 물리치기 위해 제1훈련소가 들어서 병사들을 훈련하는 등 강병의 요람이 되기도 했다.
역사는 그렇게 전개 되었다고 해도 일제의 죄과가 면책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들이 대륙을 공격하기 위해, 또는 자신들의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군사시설을 구축, 하마터면 엄청난 인명을 전쟁의 희생물로 만들뻔 했던 흔적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더욱 한스러운 것은 군사기지를 만들기 위해 강제로 편입한 토지는 여전히 군사용으로 묶이면서 지역주민들에게 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군사기지의 단초를 제공한 일제와 해방 뒤에도 그 것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정부는 아직도 역사적 부채를 청산하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일제가 모슬포에 처음 군사기지를 설치한 것은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때 일제는 중국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만주사변(滿洲事變:1931년)과 지나사변(支那事變:1937년)을 일으키며 대륙공격을 위한 교두보(공군비행장)를 구축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태평양과 동남아시아로 광활한 세력을 넓히면서 모슬포 비행장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모슬포기지가 다시 부각된 것은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잇따라 패전하면서 본토사수의 필요성이 절박해지면서 부터다. 공세를 잡은 미군은 1944년 11월부터 B-29기 폭격기를 동원해 일본공습에 나서기 시작했다. 1945년 4월에는 오키나와섬에 상륙, 80여일에 걸친 격전 끝에 오키나와를 점령하게 된다. 이어 독일군의 항복으로 유럽전투에 투입됐던 미군 함정들이 태평양으로 이동함에 따라 그 해 11월에는 일본 구주(九州) 상륙을 감행할 작전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패전을 거듭하며 궁지에 몰린 일본군으로서는 본토를 지키기 위한 총력전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이러한 요구에 의해 1945년 2월 9일 시달된 작전이 암호명을 '결호작전'으로 명명한 7개의 작전으로 제주의 군사기지화를 명령한 '결7호작전'도 그 중의 하나였다. 결호작전은 미군이 공격해 올 수 있는 지역을 예상, 각 지역마다 대비작전을 세우도록 한 것이다. 제주는 미군이 일본의 구주(九州)로 진격하는데 있어 길목에 위치한 요충지로 미군의 공격을 저지하려면 이 곳에 군사력을 상당 부분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그 해 4월 15일 일본방위사령부는 조선에 있는 군사령부를 제17방면군으로 개편하고 제주방비를 위한 제58군사령부(사령관 나스카 중장)를 신규 편성하였다. 이 부대는 5개 사단 5만8128명과 포병 전차부대 1만6848명 등 총 7만4781명의 대규모 병력이었다. 이는 한반도 다른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 보다 훨씬 많은 숫자로 오키나와 주둔군 10만명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일본군이 관동군 전초기지로 모슬포에 창설한 해군 항공대의 '아카돔보(붉은 잠자리)' 비행기. 일본 항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에는 자살특공항공대로 연합군에 여러차례 기습을 감행하기도 했다. <사진자료 '强兵隊, 그리고 摹瑟浦'>
▲1945년 패망한 일본군의 각종 진지와 무기들은 미군에 의해 파괴되거나 수장됐다. 사진은 알뜨르 야영장에 수집된 일본군 주요 전투 장비들. <사진자료 '强兵隊, 그리고 摹瑟浦'>
결7호작전에 의해 제58군사령부는 제주를 3개 권역으로 나눠 군을 배치하게 된다. 오름이 많은 동부지역은 유격진지로 96사단과 108여단이 주둔하고, 서부지역은 주진지대(主陣地帶)로 111사단이 배치됐다. 제주중앙부는 공세준비기지로 설정돼 제주시를 중심으로 한 북쪽은 96사단이, 서귀포를 중심으로 한 남쪽은 108여단이 각각 주둔했다.
이들 주둔군은 비행장과 엄체호(격납고)시설, 고각포(고사포)진지, 참호, 토치카, 해안특공기지, 동굴(갱도)진지, 하치마키 도로를 구축하게 된다. 이를테면 제주시지역의 서우봉 해안과 수월봉 해안, 서귀포시지역의 송악산 해안과 성산일출봉 해안, 삼매봉 해안에는 미군의 해안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자살 특공기지가 구축된다. 또 모슬포 알뜨르비행장과 제주 동부비행장(진드르비행장), 서부비행장(정뜨르비행장), 그리고 교래리에 비밀리 만들어진 특공용비행장 등 4개의 비행장이 새로 만들어졌다.
이들 군사시설은 대부분 결7호작전에 의해 불과 수개월 만에 상당 부분 구축되거나 진행중에 있었다. 만약 일본의 항복이 늦추어져 제주가 주전장으로 변했다면 제주는 어떻게 됐을까. 오키나와는 2개월여에 걸친 전투로 미·일 양측에 7만~15만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발생했고, 주민 12만명도 함께 희생됐다. 제주 역시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도전역의 아름다운 경관도 초토화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최상의 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일이다. 북한의 핵문제로 한반도에도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어떤 정치적 논리와 명분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역사는 웅변으로 일깨우고 있다. 지금 제주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섬'을 위한 목소리도 그런 절규라고 할 것이다.
< 글=강문규 논설실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