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칼럼]청소년을 위한 변명

[한라칼럼]청소년을 위한 변명
  • 입력 : 2007. 10.25(목)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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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청소년 범죄가 장난이 아니다. 아무리 경찰이 감시망을 촘촘히 쳐 놓아도 우리의 청소년들은 교묘히 그 틈새를 비집고 범죄와 비행에 빠져들고 있다. 학교 폭력, 절도와 강도, 심지어 납치, 구금, 테러 등 성인 조직 폭력배들을 닮으려 한다. 10대 청소년들의 성범죄율도 갈수록 치솟고 있다. 경찰청에서 나온 자료를 근거로 작성한 '성폭력 가해자 연령별 현황'에 따르면 우리나라 19세 이하 미성년 성폭력 가해자는 2003년 1천1백65명에서 지난해 1천8백11명으로, 약 37% 증가되었다 한다. 어른들이 눈살을 찌푸리며 염려, 걱정하듯이 우리의 청소년들의 탈선은 매우 우려되고 당혹스러우며 슬프기까지 한 사태라 하겠다.

하지만 한국의 어른들은 청소년들의 어두운 면만을 너무 신경질적으로 쏘아 보며 때로는 그들의 부정적 행태를 턱없이 과장하는 버릇이 있지 않나 싶다. 그들의 밝고 건전하며, 그들 나이에 어울리는 자연스런 행동을 바로 평가해 주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청소년들을 주역으로 하는 아름답고 밝은 이야기들은 얼마든지 있다. 그들의 지성, 그들의 용기, 그들의 순수가 성인들의 때 묻고 오염된 양심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며 얼마나 세찬 충격을 안겨 주는가? 세상 어디에서나 정치·사회적 혼란기에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는 젊은 그들의 함성과 진지한 사고와 과감한 행동은 인류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되곤 했다.

어처구니없는 범죄와 비행을 저지르고, 실수 연발의 사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국가적 위기에 해결의 돌파구와 폭넓은 비전을 제시하기도 한다는 사실은 그만큼 청소년들의 사고와 행동의 반경이 넓다는 말이다. 어른들처럼 긍정적 혹은 부정적 측면 어느 한쪽으로 거의 형성, 고착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교육과 자기수련, 그리고 주위의 환경적 여건 여하에 따라 장차 어느 쪽으로건 형성될 가능성 위에 놓여 있는 세대가 곧 청소년층 이라 하겠다.

어떤 가능성이 현실화 되는 과정에서 받은 영향이 그 현실 존재의 성격과 내질을 크게 좌우 한다면, 인격형성의 노상에 있는 청소년들의 훗날의 모습은 오늘 그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훈련 받고 있는가에 따라 바르게 아니면 일그러지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과연 성인 사회는 그들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할 수 있는 적합한 환경과 여건을 조성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실수와 잘못을 부끄러움 없이 지적하고, 엄히 꾸짖으며, 때로는 부드럽게, 설득적으로 타이를 수 있는 자세가 되어 있는가? 청소년들만 나무랄 일이 아니다. 어른들이 때로 청소년들로부터 이론적으로 역습을 당하는 원인부터 규명해 보아야 할 일이다.

속담에 "윗물이 고와야 아래 물도 곱다"고 한다. 우리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평범한 속담 속에는 삶의 지혜가 보석처럼 박혀 있다. 젊은이들의 삶의 수질이 뿌옇게 오염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물의 상류라 할 수 있는 성인들의 세계가 그만큼 흐려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인들이 청소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라나는 세대가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사회적으로 건전하게 성숙,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주는 일이다. 한 가정의 부모는 청소년 자녀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하여 그들의 고민과 포부, 문제와 전망에 귀를 기울여 들어주고 적절한 어드바이스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성인이 어디 있겠나 마는, 안들 무슨 소용인가?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이 성인들인 것을.

<이동준 제주성내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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