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건강&생활] 하루 더, 여행

[이소영의 건강&생활] 하루 더, 여행
  • 입력 : 2025. 03.12(수) 03:3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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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노인 정신과 전임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내 앞으로 진료 예약이 되어 있는 환자의 차트를 살펴보니 우리 병원에 처음 온 사람은 아니고 5, 6년 정도 전에 조발형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고 나서 한 번도 병원에 온 적이 없다 다시 방문한 환자였다.

알츠하이머병으로 인한 치매는 노화와 관련해 생기는 병이라 대부분70-80대에 진단을 받게 된다. 그런데 비교적 드물게, 열 명이나 스무 명 중 한 명 정도는 치매가 생기기에는 무척 젊은 나이인 65세 이전에 발병하고, 이런 경우를 조발형 알츠하이머병이라고 한다. 조발형 알츠하이머병은 유전자 이상과 관련이 있고, 안타깝게도 병의 진행도 무척 빠르다.

그동안 왜 한 번도 병원에 오지 않았을까? 아무도 병원에 데려다주지 않고 제대로 간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인 것일까? 아니면 기적적으로 조발형 알츠하이머병 진단이 오진인 걸로 밝혀져 다시 병원에 올 필요가 없었을까? 이런저런 상황을 그려보며 들어간 진료실엔 60세 정도의 고운 여자 환자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조용히 보일 듯 말 듯 미소만 띈 채 앉아 있었고 옆에는 남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조심스레 왜 그동안 병원에 오지 않은 건지 묻자 말 없는 환자 대신 남편이 이야기했다. 고등학교 때 만나30년도 넘게 함께 해 온 아내가 50대 중반에 조발형 알츠하이머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남편은 일을 그만두고 퇴직금과 재산을 정리해 아내와 여행을 떠났다. 미국의 50개 주를 모두 여행하는 걸 목표로 떠난 부부는 지난 5년간 여행을 하며 지냈는데, 이제 아내의 상태가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는 정도로 진행되어 긴 여행을 마무리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내가 상상한 어떤 경우의 수보다도 마음이 울컥해지는 이야기였다. 남은 재산으로 둘이 지내기에 적당한 작은 거처를 마련했고 이제 아내를 편하게 쉬게 해주는 것이 목표라고 선선히 웃는 남편, 우리의 대화를 알 듯 모를 듯 미소 지으며 듣고 있는 환자분, 그리고 초보 의사인 내가 앉아 있던 조그만 진료실의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이 남는다.

외과 시절에도 그랬고, 노인 정신과 의사로 살고 있는 지금도 여명이 길지 않은 환자들을 보다 보니 기억에 남는 환자들을 떠올리면 대부분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 분들이다. 소아를 보는 전공을 했으면 '그때 그 녀석은 커서 뭐 하고 있으려나?'하는 생각도 했을 텐데 말이다. 대부분의 환자가 진료를 보고 나가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가지만 나 역시, 돌아보면 환자분들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진료, 강의, 연구에 치이며 정신없이 지내다가도, 때때로 이렇게 귀한 이야기를 준비도 없이 나누어 받곤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다 한정된 시간 속에서 여행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오늘도 감사히, 소중한 사람들과 하루 더 여행하는 마음으로 지내고자 한다. <이소영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 매스제너럴브리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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