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5)해난사고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5)해난사고
대포포구 대참사… 현장을 버리고 떠나버린 함경환
  • 입력 : 2024. 06.25(화) 05: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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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마다 거룻배로 직항선에

[한라일보] 제주-오사카 직항로는 성산포, 세화, 김녕, 조천, 산지항, 애월, 한림, 협재, 신창, 모슬포, 대포, 서귀포, 위미, 표선 등 15곳 항포구를 거쳐 다시 성산포에서 시모노세키를 거쳐 오사카로 들어가기까지 4일에 걸친 항해길이었다.(사진 1) 의문이 든다. 왜 산지항, 서귀포, 모슬포, 성산포항이면 족할 것을 15곳이나. 1920년대까지 일주도로든 산간도로든 교통 기반시설이 되어있지 않았다. 사람과 물자를 주요 항구에 집중시킬 수 없었다. 조선시대의 전통이기도 하다. 1906년 제주성내에 시장이 처음 개설되기 전까지 제주사람들은 해안 포구를 활용한 선박 이동 장사를 했다. 읍면 지역마다 자기들의 주요 포구를 자랑하기 마련이다.

제주도항로도. 제주-오사카 직항선의 제주도 일주 경유지 표기. 출처 제주도와 그 경제(1930)

1923년 제주-오사카 직항로가 뚫려 1천t 내외의 대형 선박이 제주도를 드나들게 되자 제주도의 항포구 중에 직접 접안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1925년 9월 6일 군대환이 고산리 해안에 좌초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정기선들은 제주도 해안에서 더 멀어졌다. 포구에서 떨어진 바다에 기항해서 탑승객들이 건너오길 기다렸다.

이제 거룻배가 등장하게 되었다. 근해에서 큰배에 승객이나 화물을 싣거나 내리는 데 사용되는 작은배를 말한다. 이를 달리 종선(從船) 부선(艀船), 도선(渡船)이라 했다.(사진 2 3) 거룻배는 선창이나 부두를 건설할 수 없는 제주도내 포구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목선과 풍선을 주로 활용했다. 제주상선주식회사가 1924년 이후 아마사키기선과 제휴하여 제주도 항포구의 거룻배를 운영하는 하청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군대환에서 거룻배를 기다리는 제주도민 승객들.

거룻배로 산지항에 도착한 제주도민들. 1934년 8월 2일 桝田一二 촬영



빈발하는 거룻배 조난 사고

거룻배로 본선까지 향하는 짧은 거리의 뱃길은 바람이 거세게 불거나 해류에 떠밀리는 경우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본선에 오르다가 조난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1917년 4월 14일 산지항에서 조선우선 공주환의 종선이 침몰해 승조원 3명이 사망했다. 1920년 2월 하순에는 조천항에서 창평환의 종선이 침몰해 13명이 사망했다.

제주-오사카 직항로가 개설된 이후 대표적인 종선 침몰 인명 피해사고는 3건이다. 1928년 1월 27일 중문면 대포항 사건, 1929년 2월 21일 표선면 표선항 사건, 1933년 1월 7일 대정면 모슬포항 사건을 들 수 있다. 세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등에서도 연일 보도될 정도로 유명한 조난사건으로 기록된다.



대포항 사건(1928), 구명보트도 안 내려

1928년 1월 27일 오후 3시쯤 '큰갯물'(대포) 포구에서 중문면 주민 50명을 태운 풍선이 '자장코지' 너머 '몰레바당'에 머물고 있던 본선 함경환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승객이 많았는지 종선이 두 차례 출항해서, 첫 종선은 무사히 본선에 주민들을 탑승시켰다. 두 번째 종선이 50명의 주민을 싣고 본선에 닿는 순간 갑자기 폭풍이 불며 높은 파도가 일었다. 주민들이 앞을 다투어 본선에 오르려고 애를 쓰던 중에 종선이 전복되어 침몰해 버렸다. 18명은 목숨을 건졌지만 32명이 익사했다. 함경환은 이러한 사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1월 31일까지 발견한 시신이 여자만 9명이며, 23명은 행방불명되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상세한 보도를 통해, 참사의 원인을 두 가지로 정리했다.(사진 4) 첫째 종선에 승객을 너무 많이 실은 사실, 둘째 함경환이 구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력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당시 목숨을 건진 주민 오윤진은 당시의 정황에 대해 "워낙 승객을 많이 실었고 일기 때문이라 할지라도 본선에서 보트를 내리다가 그대로 올려버렸고, 함경환이 사태 수습도 하지 않고 떠나버린 것은 너무 무책임하다"고 기자에게 진술했다.

대포항의 함경환 종선 침몰사건 상세보도. 1928년 2월 7일자 동아일보



함경환 운영회사인 조선우선 측은 희생자 1인당 위자료 30원씩 지불하는 것으로 무마하려 했다. 분노한 유가족들은 대표단을 구성하고 적극 항의했다. 구명대를 사용하지 않고 구명보트를 내리지 않은 점, 신호 기적을 울리지 않고 사태 수습을 위해 1시간도 머물지 않고 떠나버린 점을 지적했다. 함경환 선장의 면직, 대포항 취급책임자인 강성익의 경질, 충분한 위자료 지급, 공개 사죄 등을 요구했다.

대포리 주민들은 이 사건을 마을 역사상 4·3 이전의 가장 큰 참사로 기억한다. 함경환 사건 후 중문 주민들의 승선 장소는 대포포구에서 성천포구('베린내')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오사카 직항로를 운항하던 대형선박회사 및 제주도내 취급점의 영리 탐욕, 승객 안전에 대한 무책임, 제주도 교통망 및 항포구의 영세성 극복 과제 등이 총체적으로 드러났다.

1975년 대포항 전경. 자장코지가 보인다. 서재철 작가 기증사진,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소장



표선항 사건(1929), '밀항자'가 돼버린 희생자

1929년 2월 21일 오전 7시쯤 표선항에 오사카로 가던 군대환이 기항했을 때 승객 26명을 태운 어선이 중도에서 전복되어 11명이 익사한 사건이다. 군대환은 원래 2월 20일 표선항에 기항할 예정이었는데, 풍파 기상 때문에 다음날 도착했다. 종선 관리를 맡던 제주상선회사 표선리 취급점에서는 성읍리에 있던 경찰로부터 도항이 승낙된 승객을 태운 종선을 본선에 먼저 도착시켰다.

경찰이 표선항에서 철수해 버리자 도항 허가를 받지 못한 주민들을 태운 작은 어선이 본선 군대환을 향해 가다가 전복 사고가 일어났다. 15명은 전복된 선체에 몸을 의지하다가 본선에서 투하한 구명보트에 의지해 목숨을 건졌다. 익사한 주민들은 모두 젊은 남자들이었다. 제주상선 취급점이 도항 허가 업무를 미숙하게 처리한 명백한 잘못이었다. 당시 제주상선의 제주도내 종선 취급주는 김병돈이었다.

희생자들이 '밀항자'였다는 이유로 유족들은 군대환 본사로부터 위자금 1인당 30원씩 급여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제주경찰서는 도항 허가를 받지 않은 취급점주 김병돈과 대리 강인술, 주임 강군오를 검거해 업무과실치사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는 도항의 부자유(경찰 허가), 군대환의 기항일 미준수, 제주상선의 이익 추구 탐욕이 빚어낸 사건이라고 꼬집었다.

모슬포항의 도선 침몰사건 기사. 중앙일보 1933년 1월 13일자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모슬포항 사건(1933), 거센 풍랑을 무시

1933년 1월 7일 오전 8시쯤 모슬포항에서 700미터 떨어진 지점에 기항 중인 제2군대환에 승선하려던 오사카 도항자 80명을 태운 종선이 전복된 사건이다. 당일 풍랑이 심하게 일었는데도 무리하게 종선을 띄워 군대환에 겨우 도착했지만 심한 풍랑으로 배가 뒤집어졌다. 25명의 승객이 파도에 휩쓸리자 군대환 승무원들이 즉각 구조에 나섰다. 3명은 익사하고, 5명은 행방불명되었다.(사진 6)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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