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4)자주운항운동-<4-1> 제주도기선과 기업동맹의 도전

[제주·오사카 직항로 개설 100주년 기획/해금(海禁)과 침탈을 넘어, 자주운항의 역사] (4)자주운항운동-<4-1> 제주도기선과 기업동맹의 도전
"우리들의 손으로 만든 배를 띄우자" 자주운항의 개시
  • 입력 : 2024. 01.30(화) 00:0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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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글머리에 홍양명이 쓴 1930년 11월 13일자 조선일보의 '동아통항조합과 제주도민의 궐기' 기고문을 소개한다. 홍양명은 제주도 최초의 사회주의 항일운동 조직인 '반역자구락부' 창립 멤버로서, 서울·일본·중국 등지에서 국제적 항일운동을 두루 펼쳤다. 그는 1928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2년여 옥고를 치른 후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이 기고문에서 홍양명은 동아통항조합(후속 연재 예정)의 교룡환 출범에 즈음하여 제주-오사카 직항로 자주운항 움직임의 배경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움트는 자주운항 움직임

영보환의 운항 방해를 비판한 조천 주재기자의 논설문. 1927년 2월 18일자 동아일보.

"

1928년 4월 15일 오사카에서 열린 제주도민대회 기사. 1928년 5월 2일자 중외일보.

일본의 6∼7만 제주도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가면서 벌이한 금전은 대판-제주도 간 편도 12원50전의 고가선임을 지불해 아마사키·조선우선 등 자본가들에게 빼앗겨왔다. 모든 인간적 학대와 민족적 굴욕을 참아가면서 피땀을 흘린 노동의 결과는 결국 이 회사의 이윤이 되어 이들의 금고에 축적되었다. 우리의 배로! 이러한 욕구가 대중의 머리에 발생함은 극히 자연 당연한 일이었다. 이 운동의 배경으로 자기 이익을 목표한 제주도민 기업가들의 1, 2차의 통항계획은 실행에 옮기자마자 대자본의 패권 하에 유린되고 말았다. 1926년 몇 기업가의 영보환이 출현되자 아마사키, 조선우선은 편도 12원50전을 1원50전까지 인하하고 수건 1개를 증정까지 하면서 선객을 유치하여 자본의 압력은 영보환을 3·4차 항로 만에 제주-오사카 항로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보다 좀 더 대중적 성질을 띤 것 같은 기업동맹이 몇 명 유지의 기도로 조직되었다."

즉, 1926년 영보환의 운항, 1928년 기업동맹의 출현을 자주운항운동의 배경 움직임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제 1923년 오사카 직항로 개설 직후 일어났던 제우사의 자주운항 움직임이 3년 뒤 또 다른 제주도 토착자본의 결집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제주도기선합자회사의 출범, 영보환(永保丸)의 취항

본격적인 자주운항운동은 1926년 11월에 이루어졌다. 오사카 거주 제주출신 김천훈, 제주도 성안에 사는 하치운, 오사카의 일본자본가가 상호 합작하여 제주도기선합자회사를 설립했다. 제주도기선은 홋카이도 오타루[小樽]항에 있는 사카이[酒井]기선회사 소유의 영보환(1200t)을 임대하여 11월 16일 첫 취항 시켰다. 당시 신문에서는 "경쟁에 있어서 해운계 희유의 사실로서 해운업자를 괄목하게 이끌어 사회문제까지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1928년 12월, 기업동맹 기선부의 결성취지문.

제주도기선회사를 설립한 제주의 두 주역 가운데 김천훈에 대한 정보는 찾기 어렵다. 또 한 사람 하치운에 대해서는 선박업과 관련된 일부 행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1922년 제주상선주식회사 설립의 발기인으로 김근시·박종실 등과 더불어 참여했다. 그러나 막상 8월 10일 창립총회 때에는 임원 명단에서 빠져 있다. 그는 식민지시대 초기로부터 제주성내에서 상업에 종사해 부자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총독부 관보에는 1914년 대정면 하모리 어업권자 대표를 맡은 사실이 확인된다. 이런 상업과 어업에 대한 지식과 경력, 자본력을 바탕으로 오사카직항로 선박업에 뛰어든 것으로 보인다.

조천의 동아일보 주재기자는 지방논단에서 제주도기선회사의 오사카항로 개통에 대해 "한 교통기관만 증가할 뿐 아니라 민중의 이익과 편리를 도모키로 목적한 민중의 교통기관이다. 대판에 있는 조선인 12개 단체가 모여 '우리소비조합'을 조직하고 직접 대판 회조부(화물하역)를 취급케 되었고 제주도 각 청년단체에서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는데, 머지않은 장래에 각 청년단체에서 제주도 회조부를 취급케 되면 순전한 무산 민중의 항해사업이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소비조합 형태의 중소자본 결집과 청년단체의 참여를 바탕으로 한 자주운항 조직을 갖추려 한 것이다.



제주도기선의 경쟁과 좌절

제주도기선은 12원50전이던 제주-오사카 운항 선박 운임을 5원60전으로 할인해 일본 선박과의 경쟁을 시작했다.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은 이에 대응해 협정을 맺고 제주도내 기항지의 거룻배를 전부 매수해 승객들을 영보환으로 옮겨 타지 못하게 했다. 일본 선박회사들은 정기출항일인 12월 1일부터 3원으로 운임을 할인해 제주도기선의 경제적 파탄을 노렸다.

기업동맹의 조직과 활동을 취재한 기사·순길환의 사진. 1929년 5월 28일자 목포신보.

제주도기선 측은 일본에 있는 조선인 노동자단체와 연결해 대항했다. 1원50전까지 운임을 내리자, 일본 회사들이 폭력단까지 동원해 영보환 승객에게 위해를 가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두 회사와의 무리한 경쟁 속에 수지가 악화된 제주도기선은 11월∼12월 두 달 동안 네 차례 항해를 거친 끝에 자주운항의 꿈을 접었다. 1927년 1월 1일부터 영보환은 조선우선에 흡수돼 버렸다.

앞의 조천 주재 동아일보 기자는 영보환의 운항을 방해하는 경찰의 책동에 대해 "(제주도) 민중은 영보환만 타고 다른 기선을 타지 않았다.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민중의 이익을 무시하고 영보환의 항행을 방해하려 하는가. 경찰은 이 점을 명료히 민중 앞에 제시하라"고 주장했다.



기업동맹의 결성

기업동맹 결성을 주도한 아나키스트 고순흠.

제주도기선의 자주운항 움직임이 두 달 만에 그쳐 버리자 제주와 오사카의 제주민들은 낙담했다. 다시금 아마사키기선과 조선우선 양 회사는 뱃삯을 인상하는 등 횡포를 일삼았다. 여기에 새로이 등장한 관제 제주공제조합이 도항 비용을 징수해 도민들의 자유로운 도항을 가로막았다.

결국 오사카의 제주도민들은 1928년 4월 25일 오사카 천왕사 공회당에서 3000명이 운집한 가운데 제주도민대회를 열었다.(상세한 내용은 후속 연재 예정) 대회 참석자들은 선임 3할 인하와 선객의 대우 개선을 결의했다. 실행위원을 선출해 일본 선박회사 측과 교섭에 나섰지만 단박에 거절당했다. 이제 제주인들의 자주운항 움직임이 대중적인 운동으로 진전할 수밖에 없는 한계점에 도달했다.

제주도민대회 이후 먼저 자주운항에 착수한 그룹은 조천 출신 고순흠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이었다. 이들은 아나키즘의 소비조합주의에 착안해 자주운항운동 조직을 구상했다. 결국 1928년 12월 10일에 가맹원 16명이 300원을 출자해 '기업동맹 기선부'를 결성했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기업동맹은 "우리들은 우리들의 손으로 만든 배로써 가장 싸게 조선과 일본 간을 오갈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홋카이[北海]우선의 제2북해환을 전세로 빌려 1929년 1월 2일 오사카항에서 제주로 첫 항해를 시도했다.

이제 본격적인 자주운항운동의 막이 열렸다. 다음 회에는 기업동맹의 자주운항운동의 전개와 좌절 과정에 대해서 글을 이어갈 것이다. <박찬식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장(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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