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해상왕국 제사터…무관심 속 원형 사라져

[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해상왕국 제사터…무관심 속 원형 사라져
  • 입력 : 2003. 03.19(수)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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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탐라왕국 유지체의 근본은 교역이었다

-용담동 제사유적


탐라의 대외교류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문헌상으로는 3세기 후반에야 나타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주호’(州胡)에 대한 기록이 탐라의 대외교섭의 시초라 할 수 있다. 물론 고고학적 유물로 볼 때 시기적으로는 그 보다 훨씬 앞선다.

 당시 탐라는 ‘주호’라는 이름으로 대내외적인 인지도를 갖고 있었다.

 그후 5세기 후반 백제와의 공식적인 국가간 접촉 이후 대외교섭의 빈도는 잦아진다.

 당시는 중국과 한반도 서남해안 일본을 잇는 국제적인 교역망이 형성된 시점이다.

 고대 탐라국 역시 이러한 국제질서속에 편입돼 있었다. 그 핵심 키워드는 해상을 통한 교역이다.

 제주시 용담동 311번지 일대.

 제주향교 뒤편 돌담을 끼고 있는 나지막한 언덕이다. 해안과는 3백여미터 지척이다.

 1993년 이곳에서는 제주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다양한 유물이 발굴돼 관심을 모았다.

 통일신라시대 토기인 회색도기와 청동제 유물, 철제류 등이 다량으로 출토된 것이다. 또 원거리 무역을 통해 들여오는 중국산 도자기와 금동제허리띠장식, 유리구슬 등이 발견됐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범위는 남북으로 길게 11.2m, 동서로 짧게는 5.4m 정도다. 유물의 출토양상으로 볼 때 중심시기는 기원후 700∼900년 사이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곳의 발굴 양상은 매우 특이했다.

유물의 집중도에도 불구 일정한 시설물 등 유구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게다가 유물의 대부분은 제사용기로 많이 쓰이는 목이 긴 병과 큰 항아리 등 고급 그릇이다.

 고내리 유적과 같은 시기이면서도 이곳에서는 당시 생활용기로 많이 쓰였던 적갈색토기 등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도심에서 한발 비켜선 이곳에서 고대 탐라시대에 무슨 행위가 펼쳐졌을까.

 이곳은 바로 고대인들의 제사행위의 흔적이 고고학적 유물로 남겨진 것이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출토되는 금동제허리띠장식과 같은 철제품이나 각종 유리구슬, 중국산 도자기 등은 지배계층이 아니고서는 소유할 수 없다. 더구나 이러한 귀중품들을 폐기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때문에 이곳은 지배계층의 특별한 의례를 목적으로 했던 장소로 추정된다.

 지배층이 주관하는 특별한 의례란 무엇일까.

 한반도의 제사유적은 이른 시기의 것이 3∼4세기에 해당된다.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그 수는 집중되는 양상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기원후 3세기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는 전북 부안의 죽막동 제사유적이다.

 또 부안 격포리, 김제 심포리, 완도 청해진, 영암 월출산 유적도 제사유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경우는 규슈 북쪽 오키노시마섬의 제사유적이 유명하다.

 이처럼 통일신라시대에 접어들면서 제사유적이 집중되는 것은 당시 해양교류 환경과 무관치 않다.

 당시는 중국 연안과 한반도 서남해안∼대마도∼일본을 잇는 이른바 ‘동방교역로’ 뿐 아니라 황해도 연안과 중국 산동반도를 직접 연결하는 ‘횡단항로’ 등이 구축됐던 시점이었다.

 탐라국이 5세기 후반부터 해양교역망을 따라 백제 고구려 통일신라는 물론 중국 일본 등과 활발한 교류를 펼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항로개척에 힘입은 바 크다.

 당시 원거리 항해를 수반하는 교류는 지배계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한반도의 서남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제사유적과 용담동 제사유적은 항해에 따른 안전을 기원했던 곳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바로 해상왕국인 탐라의 지배계층이 관할했던 제사터인 것이다.

 이곳에 예전부터 포제를 지내는 마을제단이 위치한 것도 예사롭지가 않다.

 중국 ‘당회요’(唐會要)의 7세기 기록 역시 흥미롭다. ‘성황(城隍)은 없고 5부락으로 나뉘었다는 표현과 함께 호구는 8천이 있고 문기(文記)는 없으며, 오직 귀신을 섬긴다’고 기록돼 있는 것이다.

 오늘날 포제의 기원 뿐 아니라 용담동 유적에서 행해지던 제사행위와 관련 어떤 연관성을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급속한 현대화의 물결속에 용담동 제사유적터는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발굴후 문화재 지정은 커녕 안내문 등 최소한의 조치도 없이 방치되고 있는 상태다. 이젠 주변의 건물 신축 등으로 제사유적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한반도를 포함 바다와 관련된 고대의 제사유적은 드물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크다.

 제주의 제사유적은 용담동과 조천읍 북촌리 앞 해상의 다려도 두 곳 뿐이다.

 다려도 제사유적의 경우도 파괴 정도는 심각하다.

 시기적으로 다려도 제사유적은 용담동 보다 앞선 탐라초기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 가장 앞선 시기의 제사유적에 해당된다는 점에서 정확한 성격규명을 위한 조사 및 보존대책이 시급하다.

 용담동·다려도 제사유적에 대한 대책은 더 이상 미룰 일이 아니다.

/이윤형기자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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