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09)시인에게 온 편지-이기인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09)시인에게 온 편지-이기인
  • 입력 : 2025. 03.25(화) 03:00
  • 박소정 기자 cosoro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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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온 편지-이기인




[한라일보] 청송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날아왔다



밥풀냄새가 난다 그쪽도 내 독자다



지금은 봄이군요 그리고 아무 말이 없다



새순이 돋아서 좋다 꽃이 피어서 좋다



그쪽도 어쩌다 내 쪽으로 가지를 뻗어서 좋다



검열한 편지지 속에서 삐뚤삐뚤 피어난 꽃



볼펜 한 자루에서 피어났다



오늘은 저녁 쌀 씻다 한 줌 쌀을 더 씻다

삽화=배수연



어둠에 까맣게 물든 서쪽 전면 나무 한 그루가 보이고, 우리는 그 나무를 청송교도소라 불러도 되리라. 사실이다. 몽상의 물에 얼굴을 비추며 피어난 꽃이 누군가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있고, 흰밥 한 그릇이 누군가의 눈엔 꽃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사실이다. 철창 너머 삐뚤삐뚤한 가지를 내 쪽으로 뻗은 채 피어 있는 꽃을 '독자'라 칭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것들이 서로 어울려 세계를 이루는 것이 봄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또 봄은 아직 오지 않은 봄의 자궁이 되어 오고 있는 사람의 저녁을 위해 쌀을 씻을 수 있다. 모두 봄의 사실 세계이다. 결함 많고 부서지기 쉬운 만큼 귀중한, 내면에 들어 있는 꽃으로 밥을 지어 당신에게 먹일 수 있다면 시인은 아지랑이라도 손가락으로 그러쥐어 일필을 쓰고 싶지 않을까. 그러나 말이 없는 독자처럼 '오늘'은 또 내일만큼 불확실하다. 설마 볼펜 한 자루에서 핀 꽃 하나가 내 발아래 뚝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지 싶은 봄. 이런 날, 내 안에 있는 악을 청송교도소에 보내 용서라도 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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