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 (29) '이야기 할머니' 장연수 씨
살며 힘들 때마다 유년 시절 행복 '큰 힘'
이야기 할머니로 10년 넘게 아이들 만나
"마음 녹이는 이야기… 행복감 주고 싶어"
입력 : 2025. 02.05(수) 17:15 수정 : 2025. 02. 05(수) 18:45
김지은기자 jieun@ihalla.com
올해도 '이야기 할머니' 활동을 이어 가는 장연수 씨는 어린 날의 행복감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유산"이라며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지금' 행복하기를 바란다. 신비비안나기자
[한라일보] 6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만삭이던 담임 선생님이 작은 나무 의자에 앉아 '헨젤과 그레텔'을 읽어주던 모습이다. 당시 갓 초등학교 1학년이던 꼬마 아이는 "완전히 꿈속에 빠져들었다"고 했다. 먹을 것부터가 귀했던 시절, 동화책은 상상도 못하던 그때에 선생님이 들려줬던 이야기의 온도는 세월이 흘러도 식지 않는다. 여전히 참 따뜻하고, 떠올리면 행복하다. 수십 년이 지나 '이야기 할머니'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장연수(68·제주시 이도2동) 씨의 얘기다.
|나를 살린 '행복감'
어린 시절 연수 씨는 '혼자'가 익숙한 아이였다. 동네 친구, 언니, 동생들이 한 데 어울려 숨바꼭질을 할 때도 "한편에서 구경하는 쪽"이었다. 몸이 유독 약해 쉽사리 어울리지 못했다. 수줍음을 잘 타 선뜻 말을 건네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연수 씨의 유년 시절은 행복했다.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면 항상 외할머니, 외삼촌이 반겨줬다. 사업 때문에 부산에 나가 있던 부모의 빈자리도 춥지 않았다.
"한 다섯 살 때부터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외가에 살았어요. 저희 외할머니가 정말 소녀 같으신데, 딱 제 눈높이에서 놀아주셨죠. 겨울이면 아궁이에 불을 때 방이 데워지기 전까진 빳빳하게 풀을 먹인 이불 홑청에 더 춥게 느껴졌는데, 할머니가 먼저 들어가서 몸으로 이불 안을 따뜻하게 데워놓고 들어오라고 하셨죠. 제가 이불 속에 들어가면 몸에 열이 나야 안 추우니까 꼭 껴안아 '콩콩콩' 놀이를 해 주시고요. 그때 외할머니가 제게 얼마나 각별한 애정을 주셨는지 크면서 알게 됐어요."
1960년대, "알사탕 하나 아무나 먹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모든 게 부족하고 여의치 않았기에 가족 간의 정이 더 소중했다. 연수 씨는 "소풍을 갔다 오며 건빵 하나도 혼자 먹지 않고 가져와 나눠줬던 세 살 터울 오빠와 말수는 적었지만 조카를 아껴줬던 외삼촌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했다.
기억은 수십 년이 흘러도 생생하다. 연수 씨는 지금도 어린 날의 행복감으로 마음을 다독인다고 했다. 살면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유년 시절의 행복했던 기억이 스스로를 일으키는 자양분이 됐다.
"안데르센 동화 속 '성냥팔이 소녀'는 성냥 한 개비를 그을 때마다 원하는 것을 보게 돼요. 불꽃 속에서 난로의 따뜻함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도 보지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지 않게 하는 일종의 '환각'이었던 거죠. 저도 자라면서 힘들고 아플 때, 그런 요법을 썼던 것 같아요. 아니 제가 썼다고는 하지만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되더라고요. 이런 게 아픔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방법이었던 거죠."
'이야기 할머니'로 아이들을 만나고 있는 장연수 씨. 장연수 씨 제공
|이야기로 주고받는 '감동'
'이야기 할머니'에 도전한 것도 그래서다. 유년 시절의 '행복감'을 단단한 뿌리로 삼고 살아온 것처럼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 행복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이 마흔 후반까지 했던 피아노 교습을 그만두고 가정에만 충실했던 연수 씨에겐 새로운 봉사이기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하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는 자라나는 아이들의 인성을 함양하고 세대 간의 소통을 위한 정부 사업으로, 문화체육관광부와 전국 지자체가 지원하고 있다.
연수 씨가 이야기 할머니가 된지도 올해로 11년 차다. 2014년 6개월의 기본 교육을 거쳐 2015년부터 활동하고 있다. 본격적인 활동 기간인 3월부터 12월까지는 한 주에 3일씩 어린이집, 유치원을 찾아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책 없이 오롯이 '이야기'로만 마주하는 시간이다.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우리 옛이야기와 선현 미담을 풀어놓는다. 이 시간을 위해 1년에 36편, 모든 이야기를 완벽하게 머릿속에 담는다는 연수 씨다.
"동화 구연이 색조화장이라면 이야기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얼'이에요. 별다른 도구나 미디어 없이 내 손주에게 들려주듯 이야기를 하는 거죠. 그러면 다들 이야기에 쏙 빠져서 들어요. 어떨 때는 아이들이 이야기를 듣다 '할머니, 제 마음이 정말 따뜻해졌어요'라고 말하기도 하고요. (웃음) 이야기가 감동을 준 것이지요."
장연수 씨가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로 받은 편지. 그는 아이들을 통해 "몇십 배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장연수 씨 제공
이야기를 외우고 수없이 복습하는 게 쉬울 리 없지만, 아이들을 통해 "몇십 배의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연수 씨가 10년 넘게 이야기 할머니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는 아이들과 교감하는 시간이 있어요. '할머니랑 이야기 나눠 볼까요?'라고 하면,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던 아이들도 점점 자기 생각을 발표하지요. 용기가 없어 발표 한 번 못한 아이를 '할 수 있어, 괜찮아' 하고 다독였더니 '앙' 울면서 안기더라고요. 그런 다음부턴 번쩍 손을 들고 발표를 해요. 그런 아이들을 보면 저도 크게 감동을 받지요."
연수 씨는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이 '지금' 행복하길 바란다. 어린 날의 '행복감'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유산과 같아서다. 그는 "이야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아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고, 어떤 게 옳고 그른지 생각하게 하는 힘을 길러준다"며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꿈을 주는 이야기 할머니 역할에 긍지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취재·글=김지은 기자, 영상 촬영·편집=신비비안나 기자
◇당신의 삶이 이야기입니다(당신삶)
수많은 삶은 오늘도 흐릅니다. 특별한 것 없어도 하나하나가 소중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가 모여 비로소 '우리'가 됩니다. '당신삶'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삶을 마주하는 인터뷰 코너입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분들은 언제든 문을 열어 주세요. (담당자 이메일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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