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건강&생활] 상처를 넘어서

[이소영의 건강&생활] 상처를 넘어서
  • 입력 : 2021. 03.24(수)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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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정신과 질환명이 있다. 영문으로 적어도 워낙 긴 이름이기에(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이를 줄여서 ‘PTSD’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PTSD란 병명이나 ‘트라우마(외상)’라는 단어가 최근 몇 년 새에 마치 유행어처럼 마음의 상처를 받은 상황에 대해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 됐다고 한다. PTSD는 몹시 고통스러운 증상을 수반하는 심각한 질환이기 때문에 이 말을 가볍게 남용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쩌면 정신에 남은 상처도 상처라는 인식이 보편화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신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쟁이나 재해, 학대와 같이 생명에 위협을 느낄만한 사건을 겪고 나면 그 순간의 충격과 공포가 신경계에 각인되는데, 그때가 자꾸만 기억이 나고 기억이 날 때마다 당시의 충격과 공포를 다시 경험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정신과 질환은 마음속에 있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뇌도 심장이나 간처럼 신체 장기의 하나이기에 실제로 뇌에 외상과 관련한 이상이 생긴 걸 생물학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소위 '마음을 굳게 먹는 것'만으로는 고치기 힘들다는 말이다.

어린이가 외상을 경험했을 때 우울, 불안, 감정 조절이나 학습 능력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에 대해서는 여러 방면에서 연구가 이루어져 사실로 밝혀져 있다. 그럼 한 번 받은 상처가 언제까지, 어떤 식으로 지속할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돼 있지는 않지만, 필자의 임상적 경험으로는 정신적 상처는 평생 지속한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당한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외상의 영향이 심지어 세대를 뛰어넘어 지속된다는 놀라운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가난, 험난했던 민주화 과정을 거친 한국인들도 홀로코스트 피해자 못지않은 외상을 경험해야 했다. 언제나 핍박받는 위치에 있었고, 4·3이라는 커다란 불행까지 겪어야 했던 제주도 사람들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개개인이 삶에서 겪은 외상은 말할 것도 없다. 트라우마 또는 PTSD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 중 많은 수가 아픈 상처를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뇌에 각인된 상처는 나를 상처를 받은 순간에 가두려는 속성을 지니기에, 그 상처를 넘어서지 않고는 미래로 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나를 아프게 하는 상처가 정확히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억누르고 외면하는 것은 상처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곪게 한다. 기억은 꺼내어질 때마다 새로 저장된다고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이라도 자꾸 밝은 곳으로 꺼내 생각하는 걸 반복할수록 점점 그 독성이 옅어지는 것이다. 물론 혼자서 하기 힘든 일이다. 외상 치료의 경험이 있는 치료자를 만나 상담하는 일, 그리고 적절한 약으로 증상을 조절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외상을 바르게 인식하고 치료받아야 할 아픔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트라우마 혹은 PTSD가 일부 젊은이들이 이야기하는 유행어에 그치지 않고, 정신 질환에 대한 사회 전반의 인식을 개선하는 쪽으로 순작용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소영 미국 메릴랜드의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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