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경의 건강&생활]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단상

[신윤경의 건강&생활] 사회적 거리두기에 대한 단상
  • 입력 : 2021. 08.11(수)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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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쓴 채 걷는 사람들과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신조어에 익숙해진 우리의 일상이 종종 낯설다.

요즘 부쩍 선택적 함구증을 보이는 아이와 부모의 진료실 방문이 늘었다. 이 아이들은 가족과는 이야기를 잘 하지만 낯선 타인 앞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매일 보는 유치원 교사와 친구들, 주말마다 만나는 조부모도 낯선 타인이다.

아이들은 온 세상과 상호작용하며 성장하고 사회화되어간다. 그런데 이 시기의 아이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미디어와 함께 집에서 보내고 마스크로 얼굴이 가려진 사람들을 보며 자란다. 임상의사로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일상적인 마스크 착용이 아이들의 발달과 성격형성에 미치는 영향을 자주 목격한다.

아마도 이는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시대의 여러 현상 중 일부에 불과할 것이고, 전염병의 급속한 전파를 방어하는 동시에 인간과 지구의 안녕을 지켜내는 것이 이 시대의 사명일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트라우마(외상 혹은 상처)라는 외래어가 일상 언어로 쓰여 지고 있다. 초등학생들도 트라우마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말할 정도로 흔한 표현이 됐다. 본래 트라우마는 전쟁, 자연재해와 같이 생명과 존엄을 위협하는 끔찍한 폭력이나 재앙에 노출된 사람들이 겪는 공포와 혼란을 지칭하는 정신의학적 용어이다. 어원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의학 분야에 등장한 것은 제 1, 2차 세계대전 이후이다.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일명 PTSD라 불리는 진단은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들의 정신병적 증상에 처음 적용됐다.

점차 이 트라우마는 부모의 비난, 친구의 무시, 연인과의 이별에도 널리 적용되게 됐고 어느 새 현대인은 다들 트라우마라는 감옥에 갇히게 됐다. 이렇게 상처받기 쉬운 약자 혹은 상처 받은 피해자로 살아가다 보니 세상에 늘어나는 것은 힐링과 나 홀로족이다.

서구의 개인주의와 현대 의학의 질병 개념에는 관계성이 결여돼 있다. 나의 정체성은 수많은 관계 속에 형성되고 생존 자체도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데 이것을 놓친 것이다. 우울, 불안, 공황, 자해, 중독, 쓰레기 그리고 기후위기와 바이러스 대유행 같은 사태는 우리가 관계성을 잃은 혹독한 대가이다.

현대는 나의 자유와 욕구만 추구하느라 상대는 안중에 없는 이기적 자폐 사회다. 나와 타자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돼 있기에 타자에 대한 무관심은 나의 공허로 돌아온다.

현대인의 우울과 공허의 배경에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겁쟁이에 나만 사랑해달라며 보채는 어린 폭군이 존재한다. 유독 현대인은 나이 들어도 내면은 여전히 미숙한 어린이다.

인간의 심연에는 강하고 지혜로우며 사랑이 샘솟고 정의로운 존재의 원형이 담겨 있다. 미숙한 자폐적 폭군을 벗어나 성숙한 인간이 되려면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는 이 멋진 원형들을 일깨워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수동적 힐링이 아닌 진정한 치유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공동체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예수님, 부처님, 소크라테스, 공자님 모두 공동체를 이뤄 사셨을 것이다.

공동체의 핵심은 함께 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놀되 홀로의 시간과 공간도 허용하는 것이다. 서로 살 맞대어 부대끼는 갈등의 과정없이 진정한 도반이 될 수 없고 홀로의 시간없이 성찰은 어렵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기후위기가 일깨우는 이 시대의 메시지는 공동체다. 마스크 벗고 함께 지낼 수 있는 비혈연 가족을 만들자.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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