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수의 문화광장] ‘내’가 자각할 때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

[박태수의 문화광장] ‘내’가 자각할 때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다
  • 입력 : 2021. 01.12(화)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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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관리하고 있는 명상센터 잔디밭 가까이에 이웃집 텃밭이 있다. 그 밭과 잔디밭 사이에 돌담이 있고 돌담 가운데쯤 20여년 자란 큰 녹나무가 있었다. 이 녹나무는 명상센터에 정자나무처럼 그늘도 주고 그 아래에 쉴 공간도 줘서 매우 이롭지만 이웃 밭에는 큰 장애가 됐다.

나무 그늘로 인해 밭의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몇 차례 밭주인으로부터 그늘로 인해 작물이 잘 자라지 못하니 나무를 옮기든지 베어내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아까워서 텃밭 쪽으로 향한 나뭇가지만 잘랐다. 그러다보니 나무모양이 부채꼴처럼 반쪽이 되었다. 반쪽이든 온 쪽이든 그 밭에 그늘이 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밭주인이 필자를 보자마자 마치 아이들 나무라듯 야단을 쳤다. 잘못했으니까 야단을 맞아도 별 대꾸를 못한 채 사과하고 물러섰으나 70을 넘은 나이에 야단을 맞는 게 무안하고 속상했다. 앞으로도 자주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나면 계속 욕을 먹어야 하니 아깝더라도 이웃관계를 유지하는 게 도움이 될 것이므로 녹나무를 베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한 동안은 베어낸 녹나무 자리를 보면 마음이 아파 견디기 힘들었다. 차를 운전하며 그 밭 옆을 지나갈 때 주인을 보면 인사도 안한 채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정말이지 얼굴을 맞대기조차 싫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런 모습으로 내 인생을 살다니, 아까운 인생을 버리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늦었지만 진작 나무를 베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사실 그 동안 여러 차례 나무를 옮기라는 말을 들을 때는 그분의 말을 존중하지 않았다. 잘 키운 나무를 벤다는 것이 아깝기도 하거니와 많은 사람들이 정자나무로 이용하기에 좋았으므로 '어떻게 되겠지'하는 안이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나'라고 하는 '에고'를 내려놓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내 것'이라고 생각해왔던 녹나무도 내 것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라 '우리'가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일 잔디밭 대신 농작물을 가꾸고 있었다면 애당초 녹나무를 심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 땅에만 문제가 없다면 남의 땅이야 어찌되든 상관이 없다는 경계로 인한 에고가 작용하여 밭주인의 심정을 간과했던 것이다.

그 동안 내 것이라는 에고를 내려놓았더라면 이웃 밭의 작물이 보였을 것이고, 그늘 아래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서 욕을 먹지 않고도 녹나무를 베어냈을 것이다.

필자는 '나'라고 하는 '에고'로 인해 이웃 간의 관계가 무너질 뻔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깨어나 녹나무를 벰으로써 훼손된 이웃관계를 회복했다. 지난해 코로나19로 인해 많은 사람들 간에 거리가 멀어졌다. 이제 새해를 맞이했으니 지나간 해에 내 것이라고 움켜진 에고를 벗어버리자. 벗는 순간 '우리'는 더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박태수 제주국제명상센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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