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7일간의 큰굿을 통해 진짜 심방으로 거듭났던 정공철 심방이 지난 13일 유명을 달리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 지난 30년간 동고동락했던 놀이패 한라산 회원들과 20년 가까이 무속을 전수해줬던 제주칠머리당영등굿 보존회가 함께했다. 김기삼 사진작가 제공
2년전 초신질 밟으며 심방으로 거듭나
마지막길 귀양풀이로 망자 영혼 달래
평소 민족광대·민중심방으로 이름 높던 정공철 심방이 지난 13일 저녁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정공철 심방은 1960년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서 출생하여, 국어교사의 꿈을 품고 제주대학교 국어교육과에 진학하였으나, 1980년대의 민주화의 시대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는 진보적 예술가들이 꾸린 '극단 수눌음'에 가입하여 마당극 배우로 활동했다.
그리고 그 당시 많은 예술가들처럼 그도 역시 1987년 6월 항쟁의 끝자락에서 '제주문화운동협의회'를 여러 동지들과 함께 창립하고, 그 초대 대표를 맡아 당시 제주지역의 문화운동의 최전선에서 중심적 역할을 한다. 그는 마당극 전문배우로서, 지역사회운동과 결합한 문화운동가로서 치열하게 살았다. 1989년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민주화의 분위기를 따라 제주의 역사적 트라우마인 4·3사건의 해결에 대한 지역사회의 욕구가 분출하기 시작하였는데, 제주 최초로 제주시민회관에서 '41주기 4·3추모제'가 열린다. 이 추모제에서 미리 진혼굿을 해주기로 약조했던 큰심방 고 안사인 심방이 관의 탄압에 의해 굿을 포기하고 피해버리자 졸지에 그가 대신 심방으로 굿판에 섰다.
이 때만해도 그는 심방이 아니라 마당극 배우였다. 그동안 마당판에서 늘 심방 역할을 맡았던 경험이 주효했는지 이날 많은 유족과 도민들은 그의 4·3굿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서툰바치 심방'이 진짜 한 서린 4·3의 아픔을 달랬던 것이다. 이 굿은 나중에 그가 본격적인 심방의 길로 들어서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1994년 한국 마당극운동의 본산인 '민족극협의회'는 최초로 '민족광대상'을 제정했는데,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활동과 마당극 배우로서의 자질을 인정해 초대 민족광대상의 영광을 그에게 안겨준다. 그는 이제 제주의 광대가 아니라 민족의 광대가 된 것이다.
그리고 1993년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무업(巫業)을 공부하기 위해, '제주칠머리당굿보존회'에 가입해 김윤수 큰심방 밑에서 무업에 입문한다. 그리고 단체의 사무장을 맡아 실무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2002년 칠머리당영등굿 이수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심방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각종 사가(私家)굿에도 참여하고 소위 '작은 심방'으로서 심방의 길을 생활 속에서 실현해 나간다. 제주도 최초의 학사심방이 탄생하게 된 내력이다.
2011년 9월 그는 큰심방이 되기 위한 초신질을 밟는다. 양창보 심방의 명도(신칼)를 물려받고, 서순실 심방이 수심방을 맡아 진행된 신굿인 17일간 벌어진 '큰굿'을 통해 드디어 제주의 진짜 심방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2012년에는 서순실 심방의 사단법인 '제주큰굿보존회' 창립을 도와 사무국장을 맡는다. 이제 심방으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운명은 너무도 야속하게 그에게 찾아왔다. 후두암이었다.
2013년 6월 13일 오후 6시 즈음 지난 7개월여의 투병생활도 허사가 된 듯 그는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지난 16일 제주시 신산공원 4·3해원방사탑에서는 정 심방의 문화예술인장이 열렸다. 이후 자리를 옮겨 정 심방과 함께 30년간 동고동락했던 놀이패 한라산 단원들이 준비한 귀양풀이가 이어졌다.
귀양풀이는 망자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는 일종의 무혼 의례이다. 굿의 순서는 복잡하지만, 영혼의 심정을 듣고 모든 원한을 풀어서 마음 편히 저승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게 목적으로, 지금도 도내에서 많이 행해지고 있다. 이날 귀양풀이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의 이용옥 큰심방이 메인심방을 맡아 굿을 집전했고, 회원들이 소미로 참여했다.
김윤수 제주칠머리당영등굿보존회장은 "심방은 생을 마감하고 귀양풀이를 하면 제차가 조금은 다르다"며 "당주문을 닫고 아침·점심·저녁으로 방광이라는 의례를 지낸다. 먼저 저승에간 큰심방들에게 좋은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명선기자·박경훈 제주민예총 이사장
[조사(弔詞)/문무병 시인·민속학자]"단오멩질이면 공철이 널 생각하마…"
사랑하는 아시 공철아. 이 빈복한 놈아. 무사 살 만해 지난 가부는 거냐? 이 무정한 놈아. 오늘도 아침부터 비새[悲鳥]가 날아와 낭가지에서 칭원하게 우는구나. 우는 거야 죄 될 일 아니난 막 실컷 울고 가라. 같이 심벡허멍 울어나보게. 내 팔자도 너처럼 기구하여 '정공철'이 술만 먹으면 커싱커싱 허멍, "제주대학 국어교육과 졸업하면 제대로 국어선생 할 아이를 막걸리 사주멍 꼬셩 심방 만들어부러시난 내 인생을 책임져. 마벵이 씨-팔 성님아." 허멍 술만 마시면, 악을 쓰며 반항하고 원망하는 '정광질'이를 위해, 그대를 보내는 조사를 쓰게 되었으니, 이 또한 기막힌 일이 아니냐. 아, 이 칭원하고 답답한 놈아. 광대로 사는 게, 심방의 길을 가는 게 그렇게도 고달프더냐. -중략-
너는 심방이니까 잘 알겠지. 넌 이제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중간쯤에 있다는 황량한 벌판, 고사목들 중간 중간에 가시나무 있어 죽은 몸에 걸치고 있는 옷가지, 그게 뭣인가 이승에서 지고 온 슬픔이거나 욕망의 덩어리가 아닌가. 그 모든 것, 아 훌훌 털고 이승의 우리들과 이별하고 저승으로 떠나야 하겠지. 그런 이별이 운명이긴 하지만 다시 만날 길임을 난 아네.
'미여지벵뒤'로 가는 길이 얼마만큼 먼 길인가를. 내 이야기해 줄게. 나 미여지벵뒤에 갔다 왔으니. 아마 거리로 따지면 남아프리카쯤 될 거야. 내가 며칠 전에 남아프리카 남단에 있는 제주도만 한 섬, 모리셔스에 갔다 왔지. 내 생전에 그렇게 멀리 여행할 줄은 몰랐어. 그곳은 내가 경험한 현실세계의 끝이었어. 바로 현실세계가 끝나는 지점에 저승의 피안으로 가는 저승 올레가 모리셔스라는 곳. 그곳에 나의 이여도가 있었고, 바로 그곳이 꿈에 그리던 나의 이여도, 그곳이 바로 '미여지벵뒤'라 생각하게 되었어. 그런데 그곳이 나의 현실세계 여행의 끝에서 만난 이승의 끝에 있는 천국, 제주도와 같으면서도 모든 슬픔이 다 녹아 없어져 버리고 평화로만 남은 이여도, 그곳이 미여지벵뒤였다는 거지. 그러니 공철아. 네가 먼저 가서 내가 오길 기다리는 저승은 지옥이 아닐 거야.
이 세상에도 광대들이 꿈꾸는 새 세상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네가 잘 아는 서천꽃밭. 먼저 떠난 착한 누이들이 물을 주어 키우는 생명꽃, 번성꽃, 환생꽃 들이 만발한 서천꽃밭이 있지 않은가. 내가 이여도에 갔다 왔다면, 넌 나를 믿을까? 내가 이승의 끝 남아프리카 모리셔스에 갔다 온 건 모두가 알지. 그런데 내가 천국 이여도에 갔다 왔다 믿는 사람은 없지. 그건 나의 꿈이었지. 꿈속에서 보았던 이승의 피안, 광대들이 꿈꾸는 좋은 세상 말일세. 천하의 광대 정공철아. 결이 고운 친구, 아름다운 우리들의 벗 공철아. 우린 갈 길이 머네. 그 먼 길 아름다운 광대의 길을 가기 위해 잠시 이별하는 거지.
오, 지긋지긋하게 착한 아이, 말썽꾸러기 삐돌이 정공철아. 늘 정신으로 살아 있으라. 쓸데없이 문무병을 원망 말고. 저승과 이승 길을 틀 순 없지만, 이승 사람 이승의 법도에 맞게 저승사람 저승 법에 맞게 살아가도록 하자. 당분간은 너와 내가 중음에서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니, 눈물도 슬픔도 사람으로 있으면서 흘려야 하는 거라면 우리 오늘 실컷 울고 가세. 술맛도 즐기며. 쩨쩨하게 놀지 말고, 내가 너를 만날 날은 오늘뿐, 그래서 오늘은 나도 할 말이 많았네. 공철아. 영게울림으로 저승과 이승의 역사를 쓰기엔 너무 짧은 순간일세. 본을 풀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니 먼 훗날 어느 새끼 광대가 나타나 "공철이형. 어시난 생각남수다." 하면, 어서진 단오 멩질날이면 날 생각해 달라 하며 픽 웃고 마는 그런 역사. 광대들의 역사 속에만 남아 있으라. 민족광대 정공철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