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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③서홍동 연자골
"한 평이라도"… 경사면에 일군 대규모 화전 관심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23. 08.17. 00:00:00
화전·목축문화 유산 관련 시설
광범위하게 집적돼 있어 '눈길'
계단식 밭은 고단했던 생활 방증
석축 구조물 '피우가' 상태 양호
소중한 유산으로 보전해 나가야

[한라일보] 서귀포시 서홍동 산2, 3번지 일대. 취재팀은 이 일대에서 4차례에 걸쳐 화전민들의 자취를 추적했다. 공간적으로 볼 때 산록도로에서부터 연자골 추억의 숲길, 치유의 숲길, 한라산둘레길 사이에 위치한 해발 500~600m 지점이다. 이 곳에서는 계단식 화전이 넓은 면적에 걸쳐 있는데다, 목축문화와 관련된 석축 구조물이 확인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연자골 경사면에 조성된 대규모 계단식 화전. 능선 정상부까지 이어진다. 특별취재팀

특히 연자골 추억의 숲길 능선 경사면에는 전형적인 대규모의 계단식 밭이 잘 남아있어 주목된다. 계단식 밭은 대략 20~40도 정도의 경사면을 따라 능선 정상부까지 이어졌다. 적게는 3m 남짓에서 최대 25m 정도 간격을 두고 자연석을 촘촘하게 쌓아 올려 13개 계단밭으로 만들었다. 계단식 밭의 전체 규모는 하단부에서 상단부까지 길이가 160m 정도, 좌우로 이어진 밭담은 70m 정도 됐다. 면적은 대략 3000여 평 정도 되는 계단식 화전밭이다. 지표면과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돌을 이용해 높이 1m 안팎의 담을 촘촘히 쌓아 올렸다. 지금은 동백나무와 주변 삼나무가 자라면서 한눈에 살펴볼 수는 없지만 마치 다랑이논이 연상되듯이 조성됐다.

경사면을 따라 돌을 운반하고 쌓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쳐 많은 노동력을 기울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만한 규모의 담을 어떻게 쌓을 수 있었는지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예전부터 제주에서는 "집치레는 하지 말고 밭치레를 하라"고 했다. 그만큼 척박한 땅에서 농사 짓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밭을 가꾸고, 지력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다. 토지의 생산능력은 곧 삶과 직결된 문제이기도 하다. 화전 마을 사람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좁은 땅덩이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으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곳 계단식 밭이 이를 잘 보여준다.

소나 말을 가둬 관리하기 위한 시설인 피우가.

능선 너머에는 또 다른 석축 구조물들이 산재해 있다. 고도는 해발 550m 지점으로 분지 형태의 지형을 이루는 지점에 만들어졌다. 석축 구조물은 외곽 돌담은 겹담을 위주로 일부는 외담을 잣성처럼 견고하게 쌓은 사각 형태로 축조됐다. 가로 47m, 세로 단축 40m, 장축 58m 정도로 면적은 500평이 넘는 규모다. 석축 구조물은 소나 말을 가두고 관리하기 위해 만들었던 일종의 '피우가'(避牛家, 피우소)에 해당하는 시설물이다. 그 내부는 4칸으로 구분해서 돌담으로 구획해 놓았다. 내부 역시 겹담으로 쌓았다. 소나 말을 상황에 따라 적당히 구분 관리하기 위한 용도로 구획을 한 것으로 보인다. 주변으로는 목축과 관련된 석축 구조물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서 서쪽으로는 숲속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돌담을 쌓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화전 경작을 했던 하천변에서는 물웅덩이들이 산재해 있어 물을 얻기에도 어렵지 않은 여건이다.

이처럼 산록도로에서부터 추억의 숲길, 치유의 숲길, 한라산둘레길 사이는 공간 전체가 화전과 목축, 사냥을 했던 화전 마을 사람들의 생활터전이다. 광범위한 면적에서 흔적이 확인된다. 1899년 작성된 '제주군읍지 제주지도'에 '화전동'으로 표기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조선시대 국마장인 10소장 가운데 8소장에 해당한다. 서홍동 공동목장 지경이기도 하다.

피우가 내부에 있는 석축시설.

서홍동에는 화전, 생물도, 연자골, 볼레낭산전, 멀왓 등이 있었다고 한다. 연자골에는 맨 처음 제주시 애월읍 출신 김해 김씨가 1900년경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후 제주시 봉아름에서 진주 강씨가 연자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축지 안 우마 먹는 물이 있는 냇도가 있고 부근에 3~4가호가 더 있었다고 한다. 화전 마을 주민들은 메밀, 조, 마, 고구마, 산디(밭벼) 등을 화경(火耕) 했으며 동시에 목축과 사냥을 했다.

서홍동 출신인 강 모씨는 자신의 부친이 마을공동목장을 관리했으며, 3년 정도 '케파장'을 맡았다고 했다. 케파장이란 목감(牧監)을 말한다. 당시 공동목장에서는 방목 시 목감을 두고 소나 말을 관리하게 하였다. 목감에게는 우마의 두수에 따라 보리쌀 등으로 그 삯을 지급하였다. 화전민들은 보통 테우리를 겸했다.

추억의 숲길 변에 있는 말방애.

진관훈 박사에 따르면 강씨(당시 84세)는 작년 6월 만남에서 이곳 화전민들의 생활상을 들려줬다.

테우리들은 음력 3월 청명에 우마를 공동목장에 올린 다음 음력 9월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 이후 하늬바람이 불어 목장에 풀이 마를 때까지 우마를 관리했다. 공동목장으로 올라가 우마의 방목상태를 살피고, 목장 내에 만들어진 '테우리 막'에 일시 거주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부친은 여름철 상산(上山)에 소를 올리기도 했다. 제주 지역에서는 해발 1400m 이상 고산지대에서 방목이 이뤄졌으며, 이를 '상산방목' 즉, '상산에 올린다'라고 했다. 주로 여름철에 이뤄졌다. 상산은 한라산 고산지대(해발 1400~1950m)로 고도가 높아 여름철 기온이 낮고 바람이 많아 진드기 피해가 적은 곳이다. 화전민들은 큰 두레왓 등 상산으로 소를 올려 방목했다.

화전민들은 사냥도 했고, 한라산 상부 지역 하천 절벽에서 약초(엉겅퀴 등)를 채취해서 팔아 생활에 보태기도 했다. 제주에서는 사냥꾼을 '사농바치', '산쟁이', '산포수'라고 불렀다. '사농바치'들은 단백질 섭취와 털가죽을 얻기 위해 틈틈이 사냥했으며, 산속의 지리, 날씨 변화, 산짐승의 서식지와 속성 등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 일대는 제주의 화전 생활상과 목축문화 유산이 넓은 면적에 걸쳐 집적돼 있는 공간이다. 진관훈 박사는 "이 일대에서 화전 농업과 목축문화 유산이 연이어 있거나 혼재해 있는 이유는 화전민들은 기본적으로 농사와 목축을 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연자골 일대 화전 마을은 제주4·3사건 당시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사람들이 아랫마을로 내려오면서 잊혀졌다. 비록 사람들은 떠나고 마을은 흔적만 남았지만 계단식 화전밭과 목축 관련 시설들은 소중히 보전해 나가야 할 생활문화 유산들이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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