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강부언 화가(한국화) 쌍안경 모양의 남수구…읍성의 명물 주변엔 오현단·소민문 등 유적 즐비 영주십경 '귤림추색' 이곳에서 유래 오래된 돌담에 이끼가 돋아나듯이 유서깊은 현장에는 숱한 이야기들이 남아 있는 법이다. 탐라시대부터 이 고장의 수부였던 제주읍성은 중요한 역사와 문물이 잉태되고 소멸되었던 지역이다. 이처럼 유구한 세월속에 지역의 핵심적인 도읍지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산지천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라산 흙붉은오름에 발원지를 둔 산지천은 관음사 동쪽기슭을 거쳐 제주읍내로 들어온 뒤 남수각을 거쳐 산지포로 나아간다. 강우시에만 물이 흐르는 제주의 건천들과는 달리 산지천에는 평시에도 곳곳에서 솟는 맑은 샘들이 있었다. 남수각 아래에서 샘솟던 가락쿳물을 비롯하여 산지물, 금산물, 광대물, 지장샘 등이 그것이다. 병조판서를 지내다 제주에 귀양 온 충암 김정이 팠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판서정'도 그 중의 하나다. ▲남수구 바로 서남쪽에 위치한 동치성으로 견고한 요새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에는 성윤문 목사가 세운 홍예교는 홍수로 몇차례 유실·복원됐다가 1927년 홍수로 무너지자 다음에는 복원하지 않았다. /사진=제주100년 사진집 1566년(명종 21) 곽흘목사는 을묘왜변의 교훈과 경험을 잊지 않고 종전 산지천 서안에 쌓아졌던 동성(東城)을 금산언덕 동쪽으로 물려 쌓는 등 대대적인 읍성 확장과 성문 등의 진지 구축에 나서게 된다. 이 때 동·서쪽에 성문을 세우고 남쪽에는 문 2개를 설치했다. 이로써 성안 주민들의 식수원인 산지천도 성안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목사가 성굽을 5자 더 늘려 쌓고 남문을 하나 없애는 대신 문마다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한 문루(門樓), 즉 초루를 설치한다. 또 남북의 수구(水口)에는무지개 모양의 돌다리(虹霓門)를 설치하고 성남쪽 모퉁이에는 제이각(制夷閣)을 세웠다. 그러나 이들 공사가 겨울철에 이루어지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며 원축성(怨築城)이라고도 했다. 1901년 제주에서 5년간 유배생활을 하다 1901년 제주를 떠난 운양 김윤식이 남긴 '속음청사'를 보면 "(남수구 상류에 도달하면) 양쪽 절벽이 싸고 돌아가는데 그 중간에 물이 있고, 굽이굽이 꺾여 있다. 곳곳은 앉아서 쉬면서 발을 씻을만 하다. 형승은 거의 용연(龍淵)과 거의 비슷하나 조금 협소하여 배를 띄울 수는 없으나 길이는 더 길다"고 했다. ▲오현교 동쪽 언덕 '소레기동산'에서 본 옛 동치성과 그곳에 세워졌던 제이각, 그 아래에는 산지천을 동·서로 잇는 남수구가 보인다(윗그림). 지금은 하천주변에 들어선 주택 등으로 옛모습을 상상하기 어렵게 됐다. /사진=강경민기자 오현단을 따라 북쪽으로 잠시 내려오면 검정목골에 이른다. 옛 북군농협에서 전 동부교회로 가는 길목이다. 이곳에 소민문(蘇民門)이 한말까지 남아 있었다. 이 문은 1780년 당시 김영수목사가 세운 것이다. 1764년 (영조40)부터 계속된 홍수로 성안이 침수되는 등 물난리를 겪게 되자 김영수목사가 산지천변에 간성(間城)을 쌓고 남쪽에 소민문, 북쪽에 수복문(후에 중인문으로 개칭)했다. 산지천의 물을 긷거나 동쪽으로 왕래하는 이들은 이 두 문 중의 하나를 통해 오갔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제주에는 대략 20년에 한번 꼴로 큰 태풍과 홍수가 발생,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 대풍과 홍수가 지나면 대기근이 시작되고, 이 것은 또한 전염병을 창궐케 하는 요인이 되는 등 설상가상의 재해가 반복됐다. 남수각도 이러한 재해와 무관하지 않았다. 1599년 세워진 이후 여러차례의 홍수로 유실과 복원이 거듭됐으나 1927년의 홍수로 무너진 뒤에는 복원되지 않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30년대 초에는 읍내의 홍수를 막기 위해 산지천 상류인 아라동지역의 물길을 막고, 화북천으로 돌렸다. 속칭 '막은내'가 그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7년 '나리태풍'에서 경험했듯이 재해는 계속되고 있다. /글=강문규 논설실장 성안 굽어 살피던 '制夷閣' 복원해야 흥미로운 점은 남수각이라는 지명의 유래다. 산지천 북수구인 홍예교의 경우 그 다리위에는 죽서루(竹西樓)라는 누각이 있었다. 홍수로 다리가 무너져 동쪽 언덕으로 옮겨져 공신정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러나 남수구 위에 누각이 세워졌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남수각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은 남수구와 바로 이어진 제이각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제이각은 유사시 장수가 높은 언덕에서 적의 동태를 관찰하며 오랑케를 무찌르기 위한 장대(將臺)다. 한말 남수각 동쪽 언덕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제이각이 위치해 있던 동치성은 견고한 형태로 축조됐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에서 아래를 굽어본다면 성안은 물론 주변의 언덕과 하천, 그리고 해안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어 유사시 적의 동태를 살피는데 안성마춤과 같은 곳이다. 평시에는 관리와 선비들이 경승을 감상하기 위해 즐겨 찾았을 것이다. 남수구 자리에는 1990년대 중반 오현교가 세워졌다. 건립 당시 옛 무지개 모양으로 교각을 설계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나무막대 위에 상판을 덮듯 밋밋한 형태로 세워졌다. 역사·문화에 관한 몰이해가 낳은 부끄러운 축조물이 아닐 수 없다. 제이각 터는 현재 사유지로써 공터로 남아 있어 이를 매입, 복원해 역사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강구할 때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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