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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7)제주항과 수장(水葬)학살
물길에 떠도는 영혼을 부르는 유족들의 한
입력 : 2008. 12.16. 00:00:00

▲올해 대마도 서산사에서 마련한 수장희생자의 넋을 달래는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의 위령제(사진 맨 위쪽). 대마도 태평사에 안치된 조선인 표류자의 화장된 유골(사진 가운데). 4·3 당시 해안봉쇄작전을 펼치던 미국 구축함 크레이그호.

제주4·3 당시 숱하게 이루어졌던 수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문으로만 떠돌고 있을 뿐 실상을 밝힐 자료는 아직도 부족하다.

그러나 당시 수장을 집행했던 선원들과 유족들의 증언, 그리고 전국적인 상황을 대비해 보면 4·3 당시에 벌어졌던 수장학살의 진실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

제주항은 4·3 당시 벌어졌던 무도한 수장학살의 사실을 오늘도 무심히 물결위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비밀리에 집행된 민간인들에 대한 첫 수장은 국군9연대에 의한 초토화 작전이 한창 벌어지던 1948년 11월 5일에 이뤄졌다.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이들을 제주 앞바다에 수장했다. 교체되어 들어온 제2연대가 토벌작전을 수행하던 1949년과, 해병대가 주둔했던 1950년에 걸쳐 수장학살에 대한 증언과 보고는 수없이 있어왔다.

억울한 예비검속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직후에 일어났던 예비검속은 제주도의 많은 인명을 앗아갔다. 이승만 정부는 즉각 '전국 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과 '불순분자 구속 처리의 건' 등의 치안국 통첩을 각 도 경찰국에 하달하여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인물에 대한 검속을 단행하였다.

계엄당국은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됐던 사람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때 제주지구계엄당국에서도 4개 경찰서의 집행하에 1천5백명 이상의 주민을 검속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 제주도의 예비검속과 뒤이은 집단학살의 집행이었으며, 수장 학살도 같은 상황에서 벌어졌다.

그렇다면 예비검속으로 경찰관서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수장되었는가. 여기에 대한 유족들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6·25가 터지니까 큰 오빠를 데려갑디다. 여름에 목욕하고 있다가 수건을 마루에 휙 던지며 '저녁이 늦을 것 같으면 먼저 먹고, 아니면 돌아와서 같이 먹자'고 해서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습디다. 내가 데리러 가십주. 지서에 가니까 면회는 안되고 제주서로 바로 실려갔다는거라.

제주경찰서에 뒷날 가니까 '죄가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고 예비검속으로 경찰에 잠시 있을 뿐이다. 매 한 대도 안때릴테니 돌아가 있으라'고 안심시킵디다. 거기 밥은 나쁘니까 여관에서 사서 사식을 넣고 닷새에 한번 옷을 들여놓고 했수다. 그런데 하루는 '이 옷을 어떻게 받을지, 음식은 다른 사람 준다치고… 하더니, 사실은 죽은 지 열흘쯤 됐다. 이 말을 아니할 수가 없어서 한다'면서 사정을 얘기해 줍디다. 그 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죽었다는 소식이라도 그 시국에 누가 그런 말이나 해줍니까?

육지 사정이 다급해져가서, 밤에 경찰서 앞에 차를 딱 세워서 '석방시킨다'하니 모두 뛰어나와 허겁지겁 쓰리쿼터에 올라탔는데, 그 사름덜 부두에 가서 2~3시간 배질허연 가더니, 돌을 매달고 빠뜨려 죽였덴 헙디다. 조천에서 5~6명이 이 때 죽었습니다. 각 면에서 잡혀 왔으니 작은 숫자일 리가 있수과? 이 때가 음력으로 50년 6월 21일이라. 6월 20일에 제사를 합니다."

또다른 유족은 "6월 20일날 제사를 하는데 시신을 찾지도 못하여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는데 당시 도라꾸 운전사가 수장을 했다면서 20일날 제사를 지내라고 해서 그렇게 알고 제사를 6월 20일에 지내고 있습니다."

비극의 수장학살

예비검속으로 제주경찰서에 수감되었던 안정자씨(교래리, 당시 21세)는 당시 60여명의 여성들이 함께 수감되어 있었는데 하루는 포승줄에 묶인채 나간 후 배를 탔는데 그 배는 2시간만에 빈 배로 돌아왔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녀는 당시 이 이야기를 경찰서 식당 직원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또한 이 시기에 강성모 서귀면장도 소와 고사리를 요구하던 해병 계엄부대장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죄로 잡혀가 수장되는 등 인재들의 희생도 줄을 이었다.

수장은 산지항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고 다른 지역에서도 이뤄졌다. 송악산 앞바다, 범섬 앞바다, 성산포 바다, 외도 바다 등 제주도 전역에서 수장희생되었다는 유족들의 증언이 나오고 있다.

죽은자는 말이 없다. 다만 국가의 공권력이 자국민을 바다로 데려가 죽이는 이 기막힌 시대의 비극을 이제는 늦었으나 풀어야 한다.

수장 희생자의 시신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물길을 따라 대마도로 갔을 것이라 생각하는 유족들이 가끔 대마도를 방문하여 위령제를 지낼뿐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현장에서 만난 사람/강창옥씨]"하늘길, 바닷길에서 사라져간 나의 부모님"

강창옥씨(71·사진)의 인생 이야기를 듣노라면 4·3 이후 살아온 그의 지난한 역정과 부모님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그리고 세상을 향한 절망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음을 느낀다.

그 참혹한 시대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을 그 어디에도 호소할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부모님의 사망신고조차 제대로 할 수 없어 자택에서 병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신고를 할 정도이니 얼마나 슬픈 상처를 안고 질곡의 세월을 살아왔는지 알 수 있다. 부모님의 참혹한 죽음으로 그의 4남매는 당시 60세가 넘으신 조모님을 의지하여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주변의 멸시와 위협을 받으며 어렵게 살아왔다고 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날 경찰에 의해 어머니는 하귀지서에 잡혀갔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나는 먼 발치에서 경찰들이 어머님을 구타하면서 아버지의 소재를 추궁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당시 아버님은 제주읍내 공장에 다니면서 무근성에 방 한 칸을 얻어 살고 있었으나, 당일 자정이 넘은 시간에 어머니를 데려간 경찰에 의해 손을 뒤로 결박 당한채 끌려 갔습니다. 1구서(제주경찰서)에 끌려간 후 아버지는 그 해 7월 16일 밤에 수백 명과 같이 불려나가서는 알몸으로 결박된 채 산지항에서 배에 실려 먼바다로 나가 수장 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3~4일 후인 8월 19일 밤에는 어머님마저 수백명과 같이 불려나가 정뜨르비행장에서 집단학살 되어 암매장 되었습니다."

그는 이 소식을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상귀리 출신 홍 여인(사망)으로부터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홍 여인과 함께 앉아 있다가 불려 나가면서 손수건을 건네주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살아서 나가면 자식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하면서 애들 아버지는 음력 6월 초하루, 나는 음력 7월 초닷새에 물이라도 떠놓도록 해달라며 손수건을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날이 가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없으니 하룻밤이 가면 손수건에 밥알 하나씩을 붙이면서 날이 가는 것을 표시했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가 손수건을 주고 떠나시자 어머니도 매일 밥알을 붙였으므로 희생된 날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강창옥씨는 부모님이 남기고 간 중요한 유품을 너무 어려서 제대로 보관하지 못해 커다란 불효를 범한 것처럼 괴롭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제주북부예비검속희생자유족회' 이사를 맡아 4·3진상규명운동에 헌신하고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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