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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5)서호동 시오름 주둔소
아물지 않은 마지막 토벌의 고통과 수난
입력 : 2008. 11.25. 00:00:00

▲잡목에 가려진 시오름 주둔소(사진 위쪽). 주둔소 성 세 귀퉁이에는 보초막이 설치되었다.

찬바람 불어대는 겨울 초입에 시오름 주둔소로 찾아가는 길은 매우 험난했다. 서귀포시 서호동에 위치한 고근산과 시오름의 중간쯤 목장지대에 자리잡은 시오름 주둔소는 4·3 당시만해도 서귀포와 남제주 일대. 그리고 북쪽의 한라산을 훤히 조망할 수 있는 탁 트인 목장지대였으나 지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밀림으로 바뀌었다.

60년의 지난한 세월동안 자연은 피고 지며 엄청난 변화를 했지만, 그 역사의 비명은 왜 지금까지 잠들지 못하는 것일까.

계곡을 따라 잡목숲을 헤쳐 들아가면 촘촘히 쌓여진 시커먼 석성이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다. 1950년 초 서귀포경찰서의 지휘하에 서호, 호근, 강정, 법환 등 전 주민이 동원되어 피눈물로 주둔소 성을 쌓았다.

이 주둔소는 이 때까지 한라산에 남아 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을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되었다. 당시 토벌대의 주둔소 석성 중에는 인근의 수악주둔소, 녹하지주둔소와 함께 거의 원형 그대로 잘 남아 있다.

마지막 토벌

1948년 10월 11일, 이승만 정부는 4·3 토벌의 중심 부대로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후임 송요찬 중령)를 새로 설치하여 강력한 토벌정책을 실시한다.

게다가 11월 17일에는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갔다.

특히 국군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 였던 1948년 12월과 1949년 1월, 2월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제주도는 그 자체가 '죽음의 섬'이었다.

1949년 봄으로 접어들면서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유재흥 대령)가 설치되어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시킨 후 토벌한다는 작전개념에 의거하여 모든 마을에 축성을 강화하고 전략촌을 구상하게 된다.

당시의 석성은 폐허가 된 마을을 재건하는 중산간 지역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하여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이후 독립제1대대(김용주 소령)와 해병대사령부(사령관 신현준 대령)의 토벌작전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까지 벌어져 4·3은 거의 끝난 듯 보였다.

100전투경찰사령부의 설치

이 후 한라산에 남아있는 잔여 무장대의 토벌은 제주경찰이 주도하게 된다. 1951년 창설된 제100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이원용 총경)는 필승중대, 한라중대, 백록중대, 신선중대, 뇌격중대, 충성중대로 편성하여 마지막 잔여 무장대의 토벌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토벌작전의 개념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무장대를 몰아놓고 이 지역에서 포착 섬멸하는 작전이었으며, 최소한의 경찰병력을 이용하되 다수의 주민을 동원한다는 전략이었다.

이보다 앞서 1951년 1월부터 3개월 동안, 해병1개중대(중대장 권석기 중위)가 제주경찰과 합동으로 전방에 투입되어 토벌에 나서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잔존 무장대에 대한 방어와 효율적인 토벌을 위해 한라산 밀림지대와 중산간 마을사이 주요 지점마다 25개소의 주둔소를 구축했다.

시오름 주둔소는 바로 이 시기에 축성되었다. 당시 80여명의 잔여 무장대는 기후가 온화하면서도 지형이 험한 한라산 남동쪽과 서귀포 북방 서호리 일대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토벌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중요하게 축성되었다.

이러한 주둔소는 일제 강점기 당시, 한라산 해발 6백m 고지를 원형으로 돌아가며 개설한 이른바 '하치마키' 도로를 따라 만들어 지기도 했으며,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무장대와 주민들의 움직임을 쉽게 볼 수 있는 높은 지형이나 오름 등지에 세워졌다.

삼각형의 시오름 주둔소

주둔소에는 경찰과 마을에서 강제로 차출된 청년들이 보초를 섰으며, 토벌군인들이 임시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당시 서귀포 경찰서 관내에는 시오름 주둔소를 비롯하여 모라이 오름, 법정오름, 녹하지오름, 쌀오름, 수악 등지에 주둔소가 속속 구축되었다.

시오름 주둔소의 특징은 다른 주둔소와 달리 삼각형의 형태로 쌓았다.

한 면의 길이 40여m, 전체 둘레 1백20m 정도이며, 높이는 약 3m, 폭은 1m 정도로 단단한 겹담으로 쌓여져 있다. 성벽에는 군데군데 총구를 들이 댈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다.

특이한 것은 성내에 회각이 없어서 총구 구멍이 성담 하단으로 나 있었다.

또한 주둔소 안에는 당시 토벌대와 민간인 협조원이 잠을 잤던 숙소터도 큰 규모로 남아 있다. 성 밖 주변에는 돌담으로 두른 작은 초소가 여러 개 널려져 있다.

"그때는 우터디 우턴(매우 위험한) 시절이었지, 서호리는 군인들에게 두 차례나 습격을 받았어. 처음에 군인 차가 마을에 들어와 이유를 불문하고 청년들만 보이면 총을 마구 쏘아 몇 명이 죽었어. 흰 띠를 두른 응원대(철도경찰대)였어. 우린 감자구덩이 속에 숨어 있었어. 두 번째 습격은 마을이 포위된 채 민가가 불태워지고, '젊은 청년들은 학교마당에 모이라'해서 수십명을 한꺼번에 즉결 총살시켜 버렸다."

그 험한 시절을 어떻게 넘겼는지 모르겠다는 허청(許淸) 할아버지의 증언이다.

"성은 4·3이 일어난 뒷해 초에만 한달만에 쌓았어. 강정, 법환, 서호, 호근 등지의 마을 사람들 중 오몽 못허는 사람을 빼놓고는 다 성 쌓으로 동원됐어. 진눈깨비 내리는 날도 성을 쌓았어. 성을 쌓을 때는 푸지게(짚으로 싼 등받이 지게)를 메고 돌을 날랐지. 성 쌓을 때면 등가죽이 다 벗겨지고, 먹지를 못하니까, 돌을 제대로 나를 수가 없었어. 우리집에서 돌을 나르느라 푸지게가 다섯 개나 들었어."

주둔소에서의 고난의 기억

서호 마을에 토벌군이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말 경이었다. 마을 주변에는 돌성을 쌓게 하고, 서호리 부녀자들로 하여금 군인들의 온갖 시종을 들게 하였다. 부녀자들은 낮에는 토벌군의 빨래와 식사 시중을 들었고, 밤에는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서야만 했다.

시오름 주둔소 성안에는 경찰 1명과 마을 청년 5~6명이 상주하여 보초를 섰다.

성 안에는 초가 한 채가 있었는데 이 집에는 식사를 준비하는 마을 부녀자들이 살았다. 또한 토벌을 다니다가 들린 군인들의 임시숙소로 사용 할 수 있도록 30여명 이상이 잘 수 있는 마루방도 있었다.

주둔소 보초를 서는 이들에게 주어진 무기는 수류탄 2개와 구구식총 7자루가 전부였다. 그들은 빈약한 무기와 인원을 위장하기 위해 보초를 서지 않는 보초막을 여러개 만들기도 하였다.

시오름 주둔소 등 많은 주둔소가 설치되어 제주경찰에 의해 마지막 토벌이 완료된 1954년 까지 3년 간은 경찰의 전성기라 할 정도로 숫자가 많앗다. 이는 4·3토벌 과정에서 많은 경찰인력이 양성되었고, 본격적인 4·3 이후에도 경찰 전력의 유지를 위해 제주도의 예산이 투입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제주도민의 고통도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시오름 주둔소는 제2산록도로와 1100도로가 만나는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5km 정도 가다가 제6산록교 다리 바로 옆에서 남쪽으로 2백m 남짓 수풀을 헤치고 들어가면 찾을 수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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