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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4)신엄리 자운당 학살터
조용히 흐르는 역사의 바람과 무심한 대지
입력 : 2008. 11.18. 00:00:00

▲하귀리 주민 등 애월읍 동부지역 주민들이 희생당한 신엄리 자운당 전경(사진 왼족). 납읍리 주민이 희생 당한 자운당의 또다른 곳.

신엄리 자운당의 들판에는 60년전 비명에 사라져 간 사람들의 처연한 절규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흐르는 역사의 바람은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잦아들 뿐, 채소작물이 무심하게 자라고 있다.

청용의 말의 형상으로 움직인다는 지명유래를 갖고 있는 자운당 들녘은 4·3 당시 애월면 동부 지역 주민들의 끌려와 군경토벌대에 대규모로 집단학살된 비극의 땅이다.

이곳에서는 납읍리 주민들만 학살된 것이 아니었다. 납읍 주민들이 학살된 1948년 12월 28일, 애월면 관내 하귀리, 상귀리, 유수암리, 고성리, 납읍리 등지의 주민 70여명 역시 집단적으로 끌려와 이 곳에서 학살됐다.

9연대와 교체된 2연대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송요찬 대령)가 새로 설치되어 기존의 제9연대(연대장 송요찬 중령)에 부산의 제5연대 1개 대대, 대구의 제6연대 1개 대대가 증파 보강되었다. 여기에 다시 해군함정(해군소령 최용남 부대)과 제주경찰대(홍순봉 제주경찰청장)를 통합 지휘하는 권한까지 부여되면서 본격적인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게다가 대통령령 31호로 제주도에 한정된 계엄령이 선포되어, 이후 군경의 토벌은 점점 무차별 학살로 변해 갔다. 특히 9연대와 2연대의 교체시기였던 1948년 12월말쯤의 잔인한 토벌에 따른 도민들의 희생은 엄청났으며, 이 기간의 학살과 방화는 제주도민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당시 자운당의 집단 학살 사건도 이러한 배경에서 일어났다.

이 날 자운당에서 희생된 하귀리 주민들은 1948년 12월 20일, 토벌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갔던 사람들이었다. 토벌대는 하귀1구를 포위하고 들어와 주민들을 공회당 자리(현 하귀1리 마을회관 터)에 집결시켰다. 중산간 마을에서 내려온 소개민들도 많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애월지서 경찰이 호명을 했으며, 호명된 사람들은 곧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려 제주읍으로 향했다.

비슷한 시간에 하귀2구에서는 토벌대가 주민들과 고성, 상귀 등지의 소개민들을 하귀국민학교에 집결시켜 '눈 감으라'고 명령했다.

운동장에는 열을 지어 많은 주민들이 꽉 차 있었으며, 토벌대는 산에서 붙잡아 온 주민 한 사람을 시켜 '네가 아는 사람을 지목하라'고 했다. 이렇게 무차별 손가락질 당한 사람들은 차에 태워져 제주읍내로 보내졌다.

'눈감으라 통'

주민들은 이 사건을 '눈 감으라 통'으로 현재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토벌대의 구성은 9연대와 교체되어 들어온 2연대 군인들과 수도경찰대, 애월지서 경찰의 합동이었으며, 지목된 주민들은 준비된 조흥버스 3대에 태워져 제주농업학교 2연대 본부에 끌려 갔다가 희생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이렇게 제주읍내로 끌려갔던 사람들이 약 1주일 후에 자운당 밭으로 끌려와 희생된 것을 말한다.

이 날, 학살현장을 목격했던 신엄리의 한 주민은 "자운당 서쪽 밭에서 학살집행이 있었지. 몇 명이 도망가는 바람에 5명 정도는 동쪽 밭에서 죽였어. 내가 아는 사람도 3명이 있었지. 문봉택 형제하고, 상귀 사람이야. 문봉택은 나에게 한 구덩이에 전부 담아버리면 나중에 시체를 못 찾을 수 있으니까 자기만 따로 죽여달라고 부탁을 했어. 내가 군인에게 얘기를 하자 문봉택만 밭담 쪽으로 데려가 죽였지. 희생자들은 하귀지서에 수감되었던 사람들로 알고 있어"라고 증언했다. 김씨는 당시 특공대장으로 있었는데, 군인들이 시체를 처리해달라고 해서 현장에 갔었다고 했다.

12월 28일 학살에 대해 강태중씨(하귀리·77)는 "제주읍내에서 자운당으로 향하던 차가 하귀리를 지날 무렵 조군하라는 분이 자신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웃옷을 벗어 던졌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고 말했다.

희생자들의 시신 수습은 사건 발생 6개월 후인 다음 해 5월 초 토벌대의 허락을 받은 후에야 할 수 있었다. 구덩이에 살짝 흙이 덮인 시신은 이미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 있었다. 유족들은 대강 옷가지 등으로 구별할 수밖에 없었다. 수습된 시신은 총 72구였다.

한편 이 날 아버지(고두옥·39)가 희생돼 시신수습 현장에 갔었던 고택주씨(남·79세)는 이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당시 단국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으며 3학년 수료증을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사건 현장은 하가리로 올라가는 길 입구 동쪽 밭과 아랫밭이야. 이 동쪽 밭에 큰 무덤이 둘 있었고, 무덤 하나는 길 아랫밭에 있었지. 트럭이 제주읍 방향에서 3대가 왔었다고 하는데 무덤 하나가 트럭 한 대에 탔었던 사람들로 추정돼. 도망간 사람들이 죽은 곳도 나는 아랫밭으로 알고 있어. 이 날 모두 72구 수습했다고 기억해. 공회당 자리에서 2연대 군인들과 제주경찰서 경찰들이 합동으로 하귀1리를 포위하고 들어왔다. 공회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중에 순경 하귀중학원 동창 김모 씨가 보였다. 부친은 민보단 부단장일 때인데 그가 호명을 했다.

소개민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도 많이 호명되어 나갔다. 민물동산에 조흥버스 3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날 하귀1리에서 실어간 사람 숫자는 파악이 안되고, 죽은 사람의 숫자는 19명으로 알고 있다.

납읍 주민의 희생

자운당에는 하가로 올라가는 입구, 길 동녘밭 두군데, 일주도로 아래쪽 등 세군데에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구덩이를 넣게 판 듯 했고, 흙을 덮어놓은 상태였다."

자운당에는 토벌대가 1948년 12월 28일 납읍 주민 10여명을 학살한 장소가 또 있다.

1948년 12월 28일 아침 7시쯤, 토벌대는 애월로 소개 간 납읍 사람들을 애월지서 앞으로 전부 모이라고 한 후 30여명을 호명했다. 소위 '납읍리 자위대원 명부'라는 문서를 보면서 호명했다. 토벌대는 이들을 트럭에 싣고 제주시 방면으로 가다가 신엄 지경 자운당의 한 밭가에서 총살했다.

시신은 신엄 주민들이 구덩이를 파고 흙을 덮어주었다. 그 후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시신 소재를 애타게 찾았으나 찾지 못하다가 자운당에 많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게 되었다. 특이한 것은 당시 교사였던 양순병의 시신은 다른 시신들과 같이 있지 않고 밭 두개 건너 다른 곳에 있었다 한다. 양순병은 도망가다 총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날 자운당의 희생자들은 70여명에 이르며, 희생자는 김창진, 김상수, 이기훈, 김용선, 조재환, 강두일, 김석종, 문재경, 양순병(교사), 강태운, 김창순, 현상효, 강태휴, 김전일(교사), 문상희, 강위생, 강우보, 김순, 문앵희, 문형배, 문유현, 고기현, 강민아, 한상택, 이창성, 이중근, 김대규, 하귀리 주민 26명 등이다.

국회 특위에 신고

하귀1리 주민들은 1960년 '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유족 26명의 연명으로 이 사건에 대한 진상조사와 토벌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신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자운당 희생터는 제주시 서쪽 일주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애월 조금 못 미쳐서 '자운당'과 '하가리' 도로 표지판이 보인다. 하가리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일주도로에 붙은 두번째 동쪽 밭과 길 아래 대각선 방향의 밭이 자운당 희생터이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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