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오승국의 4.3유적지를 찾아서
[오승국의 4·3 유적지를 찾아서](63)위미리 위미지서 옛터와 4·3장성
무장대의 습격으로 마을 공동체 무너져
입력 : 2008. 11.11. 00:00:00

▲4·3 당시 위미 마을은 물론 남원면 서부지역 토벌의 중심이었으며 많은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던 위미지서 옛터. 위미리 주민들의 지난한 삶을 증언하는 위미초등학교의 4·3 성담.(사진 오른쪽)

봄이면 벚꽃이 가득하고 가을이 되면 노란 감귤이 온 마을을 덮는 남원읍 위미리는 마을의 이름처럼 아름다운 마을이다.

특히 일주도로의 감귤 가로수는 지나는 객들의 혼을 뺄 정도로 유명하다.

위미리는 남원읍 서부에 위치한 마을로 동쪽으로는 남원리, 서쪽으로는 신례리와 하례리, 북쪽으로는 한남리와 경계하고 있으며 일주도로변을 따라 1리, 2리, 3리가 나란히 있는 큰 해안마을이다. '뙤미'리는 옛 이름을 간직한 위미마을은 신례리, 하례리와 함께 남원읍의 서부 3개리를 포함하는 서삼리의 중심마을이다.

아름다운 마을

4·3 당시 위미리는 남원면의 소재지인 남원리와 함께 경찰지서가 소재하여 남원읍 서부 토벌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위미리의 4·3 역사는 전개과정과 피해의 결과가 도내의 다른 마을과는 판이하다.

그만큼 위미리 주민들의 뇌리속에 남아있는 4·3기억도 아주 처절하게 남아 있다.

4·3사건하면 위미리 사람들은 무장대의 습격을 떠올린다. 그만큼 습격의 규모가 크고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위미리는 4·3 당시 무장대로부터 두 차례의 습격이 있었다. 특히 1차 습격은 위미리를 거의 초토화시켰다. 1948년 11월 28일에 있었던 이 습격은 마을주민 22명의 인명피해와 수많은 부상자를 만들어냈다. 또한 3백50여 가호 중에서 바닷가 주변에 흩어진 외딴집 10여 가호만을 남기고 모두 불타버렸다.

그 이후에 위미지서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일주도로 아래쪽에 임시 가옥을 만들어 하루 끼니를 걱정하면서 생활했고 굶주린 몸을 이끌고 마을을 에둘러 석성을 쌓았다. 마을 윗 지경에 있었던 대성동과 종남밭, 종정동, 웃뙤미, 망앞 등의 마을 주민들도 본 마을 석성 안으로 소개되었다.

1991년 위미신용협동조합에서 펴낸 '위미리지'에는 마을의 '4·3 역사'를 기록했다.

무장대의 습격

1948년 11월 28일, 1백여명의 무장대는 보리를 심기 위해 돗거름을 낼 준비에 부산하던 새벽 6시쯤, 위미리를 대대적으로 습격했다.

총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무장대들이 나타나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한 사람은 총을 들고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고 다른 사람은 초가지붕을 엮은 줄을 끌어내어 불을 붙이고는 끌고 다니면서 지붕위에 던져 방화를 하는 목불인견의 만행이었다.

때마침 불어온 하늬바람으로 마을에는 줄불이 나고 하늘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아수라의 상황 아래서 주민들은 가족들을 이끌고 바닷가나 숲속 등의 은신처에 숨어서 무장대들의 만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날 무장대의 습격은 사전에 치밀히 계획된 물자공급작전의 일환이었다. 닥쳐오는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물자의 확보가 절실했던 폭도들은 서귀포 경찰서와 비교적 거리가 먼 위미리를 택한 것이다.

50여명의 경찰병력이 서귀포에서 위미리에 도착한 때는 무장대들이 방화와 약탈이 끝난 오후 3시쯤이었고 그때는 이미 무장대가 마을을 빠져 나간 뒤였다. 당시 위미지서의 병력은 지서 자체방어에도 인원이 모자라 출동은 커녕 지서 밖으로도 나올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이날의 사건으로 주민 22명의 아까운 목숨을 잃었으며 부상자도 많이 발생했다. 또한 모든 가옥들과 함께 서삼리 사람들이 피땀흘려 세운 위미초등학교가 완전히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버렸다.

폐허가 되어버린 마을에서 주민들은 위미지서를 중심으로 하여 주변의 소나무 등을 잘라 움막을 짓고 멀리 모슬포 등지에서 미군 지붕들을 가져다가 허술한 집들을 지어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식량마저 절대부족하여 낮에는 불타버린 집터의 잿더미를 뒤졌으며 그나마 없을 때는 굶기를 밥먹듯 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위미 마을의 피해소식을 듣고 원근친척들이 약간의 식량과 옷가지 등을 가져와서 그나마 살아갈 수 있었다.

인명피해와 가옥 손실

당시 이 마을 출신이면서 하례초등학교 교사였던 현봉협(남·84)씨는 이 사건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처음 습격은 아침식사가 끝나서 동작이 빠른 사람은 밭에 가고 좀 뭣한 사람은 밭으로가는 중이 었습니다. 그래서 인명피해가 많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습격은 많이 왔습니다. 여자 어린애까지 왔으니까. 불붙이는 사람, 공격하는 사람, 서로 역할을 나눠서 온 것 같아 보였습니다. 습격 올 때는 경찰들도 속수무책입니다. 처음 습격에서는 지서를 포위하고 서귀포경찰서에서 올 것을 가상해서 일주도로에다가 담을 쌓아서 도로 차단하고 유유히 한 것입니다. 오랜 시간 머물기도 했습니다. 집들 거의 전부를 불태운 셈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주민들은 전부 바닷가로만 모였습니다. 성급한 그 추위에 물 속으로 들어가고, 궁하니까. 바닷가에 간 사람은 살아나고 우리 어머니는 다 피하게 하고, 불붙은 것을 보면서 의복을 꺼내러 집에 들어와 방에 옷을 꺼내고 나오는데 총으로 바로 쏴버렸어요. 어린 아이까지 죽었으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어요."

1948년 12월 31일, 무장대는 다시 위미마을을 덮쳐 명절제수 등을 강탈했다.

위미 마을주민들은 1차습격 이후 민보단을 조직하여 경찰지서의 지시에 의해 대규모 성을 쌓아 무장대의 습격에 대비하였다.

4·3성 축성 사업에는 마을의 모든 남녀노소가 참여했다. 성곽은 위미1리 전포교 앞에서부터 '밍금'까지 이어졌고 위미초등학교 뒤쪽에서부터 동쪽으로 서광사 '마메기' 앞 '흙통폭낭' 뒤쪽을 거쳐 위미2리사무소와 '벌러니 코지'까지 이어졌다. 이 성곽은 당시 2개월의 대역사 끝에 이루어 졌으나 지금은 과수원의 밭담으로 되돌아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현재는 위미초등학교 뒷담으로 이용되고 있는 3백여m의 4·3성이 남아있다.

위미지서는 1948년초 위미2리 마을 중심에 있었다. 현재의 남원파출소 분소 자리가 4·3 당시의 그 자리며

다시 화해와 상생으로

1948년 11월 28일 무장대의 대규모 습격 이후에는 위미지서를 중심으로 주민들이 모여 살았다.

위미 마을에서도 서북청년회의 횡포는 극심했다. 이들은 위미지서 경찰들과 함께 근무하면서 습격에 대비했는데 위미리 주민의 상당수가 서북청년단원의 횡포를 감수해야 했다. 특히 서북청년단원 중에 '차서방'이라는 사람은 주민들을 폭도로 몰아 괴롭혔다고 기억하고 있다.

위미지서는 당시 남원읍 서부지역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특히 1948년 12월 12일, 신례리 주민 여러 명이 위미지서 경찰들에 의해 '마메기모루'에서 학살되었다.

1960년도에 발표된 '국회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의 양민학살진상규명 신고서에는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적고 있다.

국회양민학살 진상규명신고서 신고자들 가운데 학살장소를 '마메기모루'로 신고한 희생자는 신례리의 양성현 등 12명이다.

위미마을의 4·3은 다른 마을과 달리 좌·우익의 표면적인 충돌이 없었을 뿐 아니라 이른바 '좌익계열'의 마을 사람들도, 위미리 습격에 동참했거나 직접적으로 마을 사람들 간에 횡포를 부렸다는 증거는 없다.

따라서 위미 마을은 4·3의 남긴 엄청난 시련과 참혹상에서 보는 것처럼 모두가 원통한 피해자였으며 역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이 내려져 초토화작전이 한창인 시기에 위미와 남원마을을 동시에 습격한 무장대의 전략은 우선 동절기를 대비한 물자조달과 지리적으로 응원대가 오기 힘든 취약지구 습격의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남원면의 해안부락과 중산간 부락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도 역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위미마을은 4·3으로 인해 60여 명의 인명희생과 가옥이 전소되는 피해를 입었다. 종남밭은 지금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아 있다.

<4·3연구소 이사 osk4843@hanmail.net>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아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