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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탐사
[大河기획/한라산 학술 대탐사(236회)]
제2부 한라대맥을 찾아서(70)
입력 : 2005. 03.18. 00:00:00

▲솔개 모습을 하고 있는 남송악은 서남사면 21만평에 조성된 서광다원으로 인해 일년 내내 찻잎 향기 가득한 오름이 돼버렸다.

남송악…오름주변엔 茶 향기 가득

지난 12일, 마지막 꽃샘추위인가. 서부관광도로에 하얀 눈발이 휘날린다. 시야가 가려 운전자가 애를 먹는다. 언뜻언뜻 보이던 주변 오름들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동광검문소를 지나 생태신화공원 조성 예정지에 당도했다. 도너리오름에서 시작된 한수기 곶자왈이 말 그대로 광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안덕면 서광리 소재 남송악의 동사면을 빙 둘러 오르는 길목을 찾으니 오름의 원형분화구가 뚜렷하다. 오름 주변에는 광대한 벌판을 형성케 한 도너리오름이 우뚝한 반면, 풍수지리 해석으로 죽은 돼지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문도지오름 등이 자그마하게 앉아있다. 동남쪽으로는 동광 북오름과 오름의 모양새가 갈리어 있다는 거린오름, 넓은 게 모양의 광해악이 이웃하고 있다.

 남송악은 남쪽 비탈에 소나무가 많아 남송이, 이를 한자어로 대역하여 남송악(南松岳)이라는 설과 풍수지리에서 소로기(솔개의 제주어)의 형세로, 남쪽의 솔개오름이라 해서 ‘남소로기’라고도 한다.

 남쪽의 넙게오름을 기점으로 1963년에 동쪽에 서광동리, 서쪽에 서광서리로 나뉘어 있다. 그 이전에는 합쳐서 자단리(自丹里), 광챙이(한자로는 廣淸里)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광리는 서기 1402년(태종 2년)에 제주, 대정, 정의 삼군제를 실시할 당시 대정군의 소재지로 알려지기도 한다.

 찻잎 같은 오름이라고 할까. 남송악 서남쪽은 온통 녹차 밭이다. 태평양 그룹이 총면적 21만평에 조성한 서광다원이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의 차 생산량을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청정한 환경 속에서 재배하여 설록차 맛이 일품이다. 제주 녹차의 역사는 비록 짧지만 이제 세계적인 명차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온 추사 김정희는 차나무를 가꿀 만큼 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다인(茶人)이었다. 그는 일찍이 청나라에서 배운 차를 매개로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소치 허유 등 국내 다인들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초의선사로부터 차를 선물 받고 친필로 써서 보낸 시가 ‘명선(明禪)’이다. 그는 9년간 대정읍 안성리 초가에 머물면서 뜰에 차를 심고, 찻잎을 따서 마시면서 그 유명한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라는 명작을 후대에 남겼던 것이다. 추사적거지에 명선이라는 친필이 전시되어 있다. 이것이 제주 차의 효시다.

 하지만 이제 제주도는 녹차의 주산지로 급부상했다. 일제 때 녹차재배사업이 시행되긴 했어도 제주도가 녹차 주산지로 떠오른 것은 1981년부터 이곳 서광다원을 비롯해 도순 한남다원을 조성하면서부터이다. 국내 녹차시장의 80%를 점유하고 있는 게 제주 녹차이며, 청정지역 일교차가 큰 중산간일대 화산회토에서 자란 최고품질의 차가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잠시 설록차뮤지엄 오’설록에 들르면 한국 차 문화의 변천사, 제조 과정, 차의 활용 등 차 문화실을 관람할 수 있으며, 전망대에 올라 서광다원과 남송악, 그 너머 한라산 정상까지 조망할 수 있다. 각종 다구와 차 관련 기념품, 그리고 달콤한 녹차 아이스크림과 차 등을 즐기며 여유를 가져 봄직도 하다.



가마오름…일본군 진지 평화박물관 변신

▲일본군 진지동굴로 유명한 가마오름은 이제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증언하는 명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오’설록에서 서쪽으로 달려 평화박물관이 조성된 가마오름을 탐사했다.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 비고 51미터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과 같다고 해서 오름 이름이 붙여졌는데 오름 전 사면에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져 있고 정상 등 군데군데 풀밭을 이루고 있다. 단숨에 정상에 오르니 결코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서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태평양전쟁 당시, 이곳에 일본군이 대거 주둔했던 이유를 가늠케 했다.

 가마오름은 이제 평화박물관 개설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영근 관장의 안내로 전시실과 진지동굴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부터 부친으로부터 진지굴착에 동원되어 고생했던 일들을 숱하게 들었던 이 관장은 고향 청수리 집에 있었던 유물과 수집해온 여러 가지 유물을 합쳐 그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재현해놓았다. 땅굴작업용 조명기구, 측량기, 군복, 철모, 수통, 재봉틀, 그릇 등 군수품과 생활용품, 그리고 각종 도서 등 4백여 점을 관람할 수 있다.

 작년 3월 개관한 후 관광객은 물론 도내 학생들의 역사교육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소문을 들어 찾아온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관람 후 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은 싫어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진지동굴 관람도 가능해졌다. 3층 구조로 연결된 진지동굴은 미로처럼 얽혀져 있고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진지 땅굴을 파기 위해 동원됐던 제주사람들의 고생했던 일들이 쉽게 짐작된다. 관람이 가능하도록 한 구간에 밀랍인형 등을 세워 당시 진지동굴 내부에서의 일본군 생활 모습, 부역을 당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실감난다. 부역 동원 주민들의 증언 채록에서부터, 자료 수집, 전시까지 관장 혼자의 힘으로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다시는 이 땅에 포성이 울리지 않고 평화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재현해놓은 평화박물관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느껴졌다. 논의는 무성하지만 수많은 진지동굴이 방치된 채 대책 없이 훼손되고 있는 장면을 수없이 봐왔던 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오’설록에서 서쪽으로 달려 평화박물관이 조성된 가마오름을 탐사했다. 한경면 청수리에 있는 비고 51<&27841>의 나지막한 오름이다. 가마솥을 엎어놓은 모양과 같다고 해서 오름 이름이 붙여졌는데 오름 전 사면에 소나무와 잡목이 어우러져 있고 정상 등 군데군데 풀밭을 이루고 있다. 단숨에 정상에 오르니 결코 높지 않은 오름이지만 서쪽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태평양전쟁 당시, 이곳에 일본군이 대거 주둔했던 이유를 가늠케 했다.

 가마오름은 이제 평화박물관 개설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영근 관장의 안내로 전시실과 진지동굴을 둘러보았다. 어릴 적부터 부친으로부터 진지굴착에 동원되어 고생했던 일들을 숱하게 들었던 이 관장은 고향 청수리 집에 있었던 유물과 수집해온 여러 가지 유물을 합쳐 그 당시 역사를 생생하게 재현해놓았다. 땅굴작업용 조명기구, 측량기, 군복, 철모, 수통, 재봉틀, 그릇 등 군수품과 생활용품, 그리고 각종 도서 등 4백여 점을 관람할 수 있다.

 작년 3월 개관한 후 관광객은 물론 도내 학생들의 역사교육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소문을 들어 찾아온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관람 후 왜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은 싫어하는지 알게 됐다고 말한다.

 진지동굴 관람도 가능해졌다. 3층 구조로 연결된 진지동굴은 미로처럼 얽혀져 있고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 진지 땅굴을 파기 위해 동원됐던 제주사람들의 고생했던 일들이 쉽게 짐작된다. 관람이 가능하도록 한 구간에 밀랍인형 등을 세워 당시 진지동굴 내부에서의 일본군 생활 모습, 부역을 당하는 주민들의 모습이 실감난다. 부역 동원 주민들의 증언 채록에서부터, 자료 수집, 전시까지 관장 혼자의 힘으로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다시는 이 땅에 포성이 울리지 않고 평화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지른 만행의 역사를 재현해놓은 평화박물관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느껴졌다. 논의는 무성하지만 수많은 진지동굴이 방치된 채 대책 없이 훼손되고 있는 장면을 수없이 봐왔던 터이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요즘은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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