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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의 역사
[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독자적인 토기 브랜드를 만들다
입력 : 2002. 07.31. 00:00:00
9. 1,500년전 탐라인들 어떻게 살았을까

(4)탐라후기 토기의 중심거점

제주섬에 고내 유적과 같은 토기생산기지가 남아 있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제주는 화산섬이기 때문이다.

 주로 신생대 제4기(약 160만년전 이후)의 화산활동에 의해 대부분 지표가 형성된 젊은 화산섬이다. 현무암이 검은 띠처럼 섬 전체를 돌아가며 덮여 있고 토양 역시 ‘빌레’라 불리는 암반과 맞닿아 있다. 제주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현무암 지대에서는 토기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어떻게 고내리에서는 토기제작의 전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는 생산기지를 형성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다름아닌 이곳의 지형지질에서 찾아야 한다.

 해발 2백미터의 고내봉 일대는 수성화산(水成火山) 활동의 산물인 응회암지구로 오래전에 형성된 고(古)토양이 발달해 있다. 고내봉에서 해안가 방향으로 분지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토양이 노출되어 있는 응회암지구이다.

 화산활동에 의한 현무암 대신 풍화·퇴적작용에 의해 생성된 이곳 양질의 점토가 고내리식 토기 생산기지 역할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고내유적의 그 많은 구덩이들은 다 무엇일까.

 구덩이는 직경 2∼3m이상인 대형과 1∼1.5m 내외의 소형이 대부분이다.

 대형구덩이 내부는 토기생산과 관련된 야외요지, 흙을 파냈던 구덩이, 토기제작후 파편과 불에 탄 흙을 폐기한 구덩이, 곡물을 저장했던 구덩이 등으로 추정됐다.

 1백17개에 달하는 그 많은 구덩이들은 다름아닌 당시 고대인들이 이곳에서 흙을 캐내고 토기를 만들고 야외요지에서 구워낸뒤 저장하거나 제대로 안된 것은 버렸던 생생한 현장인 것이다.

 1500년전 고대인들은 고내봉 기슭을 누비면서 사냥을 하거나 수렵생활을 병행하면서도 전문적으로 토기를 굽고 이를 섬 곳곳에 공급했다.

고내리식 토기는 이곳에서만 만들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다시 제주섬의 지질적 특성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고내리식 토기는 고내봉 일대 응회암지대가 형성돼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응회암지구는 제주섬의 해안선을 따라 드물게 형성돼 있다. 한경면 고산이나 대정읍 상모리, 안덕면 사계리, 구좌읍 김녕, 성산읍 성산 일대가 그렇다. 공교롭게도 이들 지역은 고내리식 토기 분포지역과도 상당부분 일치한다. 서북부 지역은 물론 종달리 등 동북부 지역, 신풍리 태흥 일대가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이들 몇몇 지역에서도 고내리식 토기는 제작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곳에서 고내리 유적과 같은 토기생산기지가 밀집된 유구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어디까지나 토기의 중심거점은 고내리 유적인 것이다.

 고려 충렬왕 26년(1300)에 설치된 15개 현촌 중 고내를 포함 귀일 애월 곽지 등 4개 현촌이 밀집돼 있는 것은 이처럼 탐라시대부터 이곳이 제주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당시 고대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이곳에서 나오는 다양한 동물뼈로 보아 수렵과 어로 및 원시적 형태의 농경생활을 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일부는 흙을 채취하고 토기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등 분업화된 사회구조와 대량생산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구덩이 유구의 배치 양상 뿐 아니라 규격화되고 제품화된 성격이 강한 고내리식 토기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고도의 전문화된 기술로 생산된 토기는 교역에 의하든 아니면 일상생활에 따라 자연스레 이동하든 섬 전역으로 확산됐다.

 적어도 1500년전 제주섬은 고내리에서 생산된 토기가 일상생활을 지배했던 것이다. 요즘 식으로 말을 하면 고내리식 토기는 제주섬의 독자 브랜드인 셈이다.

 하지만 탐라후기의 대표적인 고내리 유적은 관계당국의 무관심으로 차츰 훼손될 위기에 처했다.

 본보 ‘섬의 역사 탐라의 역사’ 취재팀이 보도(2002년 7월 18일자 18면)에서 드러났듯이 유적 주변에는 현재 군도 확포장 공사가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이 유적이 중요한 것은 토기생산거점으로서 뿐 아니라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탐라후기 집자리유적이 발굴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탐라후기 집자리 유적의 발굴은 고고역사학계의 오랜 과제로 남겨져 있다.

 고내리 유적은 바로 탐라후기 사회문화상을 밝혀줄 키워드를 품고 있는 곳이다.

/이윤형기자 yhlee@hall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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